2000년의 페이지를 넘기는 시점에서 확실한 것 하나는 "정주영의 현대"는 이제 없다는 것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일군 현대그룹은 소그룹으로 쪼개지면서 분해됐다. 국내최대 자동차기업인 현대차는 정주영이 아닌 정몽구 회장에게. 국내 최대 조선회사인 현대중공업은 정몽준 고문에게 넘어갔다.
현대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던 계동사옥은 외환은행에 맡겨져 외국기업에 넘어갈 처지다. 또 유조선으로 물막이한 정주영 공법으로 유명한 서산간척지는 정주영 손을 떠나 이름도 모르는 일반 농민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됐다. 정주영의 성과는 지난 한해동안 철저히 파괴됐고 한국경제 발전의 최대 공헌자라는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99년말기준 30대 기업집단현황을 보면 현대는 자산 88조6490억원 자본 34조5480억원 자본금 13조2870억원 매출 95조470억원으로 국내 1위의 재벌이다. 자산면에서 현대는 2위인 삼성보다 무려 21조원이나 많고 자본과 자본금도 월등했다. 매출만 삼성보다 13조원정도 적을 뿐이다.
현대는 지난 5월말, 6월말 정몽구 회장측과 정몽헌 회장측간 치열한 암투 끝에 자동차소그룹 10개사가 떨어져나옴으로써 분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몽헌 회장이 실질적 오너 역할을 하게 될 새로운 현대는 25개 계열사에 매출 69조원, 자산 58조원, 부채 48조원으로 삼성에 이어 재계 2위가 됐다.
하지만 내년상반기중 자산 20조원 규모의 현대전자가 분리되고 연말까지 자산 11조원 규모의 중공업계열이 분리되면 현대는 자산 25조원으로 재계 5위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반면 9월1일 새로 출범한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은 10개 계열사에 매출 27조원 자산 31조원 부채 20조원으로 재계순위 5위 수준이다. 현대가 재계5위로 떨어지면 현대차그룹은 4위로 올라서게 된다.
중공업계열인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도 내년말까지 현대에서 분리된다. 지난 11월말 현대측의 계동사옥 매입요구를 끝까지 거절하면서 이미 독립된 계열의 길을 걷고 있음이 확인됐다. 중공업은 전자, 고려산업개발 등 현대계열사들의 지분을 해소하고 1000억원이 넘는 건설 지급보증을 내년중 해소, 법적인 관계를 청산한다. 중공업 계열은 지분 10.3%를 보유중인 정몽준 고문이 실질적 오너다.
지난 90년대초부터 준비한 후계작업 및 구조조정 계획에 따라 이뤄진 계열분리는 정주영 체제가 갖고 있던 강점의 무력화, 각 구성원들의 경쟁력 약화라는 정반대의 성과를 보여 "실패한 구조조정"이다.
계열분리에 따른 정씨 4부자의 명암도 엇갈렸다. 무엇보다 가장 큰 피해자는 한때 재산이 45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던 정주영 명예회장이다. 그는 그나마 갖고 있던 2400억원 가량마저 현대건설에 출자, 마지막 재산을 현대를 위해 쏟아부었다.
하지만 정몽구, 정몽헌 회장은 아버지가 일군 계열사들을 하나둘씩 챙기면서도 자신의 돈은 한푼도 쓰지않았다. 정몽준 고문만 중공업 주식을 매입하느라 수백억원을 쓴 것으로 국내 최대 조선회사인 현대중공업을 사실상 상속받는 것으로 그들의 시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