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둥이 여자'에서 '스토킹 피해자'로…고선웅표 '카르멘'

장병호 기자I 2023.09.11 09:00:00

지난 8일 막 올린 서울시극단 신작 연극
카르멘, 주체적 여성으로 재해석
데이트 폭력 등 사회적 문제 연상
"잘못 없는 카르멘, 관객도 공감하길"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비제의 오페라로 잘 알려진 ‘카르멘’의 여주인공 카르멘은 흔히 ‘바람둥이 여자’로 묘사된다. 카르멘의 남성 편력에 집중해 그를 말초적이고 육감적인 캐릭터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시극단 연극 ‘카르멘’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막을 올린 서울시극단 연극 ‘카르멘’은 이러한 통념을 깨고 새로운 캐릭터로 카르멘을 제시한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사랑하고 이별하는 주체적인 인간이자, 한 남자의 집착이 불러온 스토킹 피해자로 카르멘을 그린다.

연극계 대표 연출가이자 서울시극단 단장을 맡고 있는 고선웅 연출이 이번 ‘카르멘’의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개막 전 가진 언론시연회에서 고 연출은 “원작에서 카르멘을 죽인 돈 호세는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카르멘은 큰 잘못이 없다는 걸 관객과 함께 공감하고 싶었다”고 각색 방향을 설명했다.

‘카르멘’은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가 발표한 동명 소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작곡가 조르주 비제가 1875년 초연한 동명의 오페라를 원작으로 한다. 1820년견 스페인 세비야에서 집시 여인 카르멘과 카르멘의 매력에 빠져버린 병사 돈 호세를 중심으로 잘못된 만남, 의도치 않은 사고, 변해버린 마음과 붙잡아 두려는 마음이 뒤섞이며 펼쳐지는 비극을 그린다.

연극은 원작의 기본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고 연출 특유의 스타일을 더했다. 특히 인물들의 감정을 때로는 직설적이고 때로는 은유적으로 담아낸 대사가 인상적이다. 고 연출은 “연극 본연의 맛은 과장되고 옛스러운 것에 있는데, 요즘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이러한 연극 본연의 매력이 위축된 것 같았다”며 “시는 아니지만 마치 시처럼 일상과 다른 어투로 낭송하듯 대사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극단 연극 ‘카르멘’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무대 구성은 심플하다. 무대 한 가운데 원형의 비스듬한 무대를 설치하고, 무대 뒤편의 조명 변화를 통해 공간의 변화와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한다. 투우장을 모티브로 삼았다. 고 연출은 “투우장의 이미지가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며 “구심력 또는 원심력처럼 인물과 인물이 서로 돌고 도는 힘의 관계 또한 잘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무대를 이렇게 구성했다”고 밝혔다.

작품 속 카르멘과 돈 호세의 모습은 데이트 폭력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른 지금 시대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카르멘은 자신에게 자꾸 집착하는 돈 호세를 향해 “자신을 새장에 가두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카르멘은 “나의 감정은 이미 사라졌다”고 냉정하게 말하지만, “너는 내 아내가 돼야 한다”고 매달리는 돈 호세의 모습은 진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돈 호세의 마지막 대사도 바뀌었다. 원작에선 “내가 카르멘을 죽였다”라고 말하지만, 이번 연극에선 “내가 카르멘을 가졌다”라고 말한다. 고 연출은 “집착이 광기로 변했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바꾼 대사”라며 “관객 입장에선 돈 호세처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선 연극 ‘진짜나쁜소녀’, ‘작가노트 사라져가는 잔상들’ 등에 출연한 배우 서지우가 카르멘 역, 연극 ‘리차드3세’, ‘햄릿’ 등의 배우 김병희가 돈 호세 역을 맡는다. 서울시극단 단원 최나라가 돈 호세의 연인 미카엘라 역, 단원 강신구가 카르멘을 사랑하는 투우사 에스까미오 역으로 출연한다. ‘카르멘’은 오는 10월 1일까지 공연한다.

서울시극단 연극 ‘카르멘’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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