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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사과와 국격의 갈림길’ 강경화의 딜레마

정다슬 기자I 2020.08.26 06:00:00

국회 외통위 자리서 "국민과 文대통령에게는 송구"
"뉴질랜드에 사과하는 것은 국격의 문제"
국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이해하지만…역지사지로 접근해야
폼페이오 장관이 내가 아닌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안하다 했다면…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이 문제를)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나라에 사과하는 건 국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5일 외교관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해 “뉴질랜드 정부나 뉴질랜드 국민, 피해자에게 사과했느냐”는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이같이 말했습니다.

강 장관은 평소 국회에서 어떤 질타에도 침착하게 대응을 하는 장관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이례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이 의원과 설전을 벌였습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6월 24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제7차 그린라운드테이블’ 프로그램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사진=이데일리 김태형 기자]
강 장관의 발언을 보면, 그의 사과 대상은 국민과 문재인 대통령입니다. 이 사태를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외교적 갈등으로 비화시킨 것이 송구스럽다는 것입니다.

다만 뉴질랜드 근무 시절 현지인 직원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은 외교관 A씨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습니다.

강 장관은 “피해자가 했다는 이야기들이 언론을 통해서 나오는데,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신빙성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피해자의 말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일 순 없다는 취지입니다. 아울러 A씨에 대한 외교부 징계위의 판결에 대해서는 외부 위원들의 의견을 수용해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이라며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뉴질랜드 측에 불쾌감도 드러냈습니다. “외교관계에서는 기본 틀이라는 것이 있는데, 정상 간 통화에서 의제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 의제가 된 것”은 뉴질랜드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정상 간 대화는 사전에 의제부터 양국 실무진영에서 면밀하게 조율됩니다. 지난달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전화통화 역시 코로나19 방역 모범사례로 알려진 두 나라에 대한 덕담, 향후 경제협력과제, 한화중공업이 만든 뉴질랜드 군수지원함 인도에 대한 축하 등 훈훈한 자리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던 총리가 예상에도 없던 성추행 문제를 꺼내들고, 그 가해자도 다름 아닌 외교관이라니 그 참담한 속이야 오죽할까요.

결국 A외교관은 ‘물의를 일으켰다’(성추행 혐의가 아닙니다)는 이유로 귀임 조치를 당하고, 강 장관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정상 간 통화에 이르기까지 외교부의 대응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청와대의 지적을 받고 24일 대국민사과를 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뉴질랜드 방송 뉴스허브가 지난7월 25일 심층보도한 한국 외교관 성추행 사건 [뉴스허브 캡처]
저는 외교부를 출입하는 기자로서 이 일련의 사태를 취재하면서 가끔 딜레마에 빠지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인 그를 뉴질랜드에 송환해 심판해야 한다는 뉴질랜드 측의 목소리를 마냥 받아들여도 될까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A씨의 행위를 변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친하다는 이유로 그런 부위를 세 차례나 거쳐 만졌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A씨가 모 의원처럼 “같은 남자들끼리 엉덩이 한 번 툭툭 칠 수는 있다”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을까요?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성적 불쾌감을 느낀 이상, 이는 명백한 성추행입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적절한 사법절차를 밟지 않은 우리 국민을 뉴질랜드에서 심판받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습니다. A씨를 뉴질랜드에서 심판받게 하는 것이 그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마땅히 받아야하는 법적 권리와 보호를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됐기 때문입니다.

저는 강 장관의 “우리 국민께 사과드리는 건, 어쨌든 국민을 불편하게 해드렸기 때문이지만, 상대국에 사과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발언은 이런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 장관이 만약 국회라는 자리에서 뉴질랜드 국민에게 사과한다면 A외교관이 유죄라는 점을 인정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강 장관이 사과를 하는 순간 일거에 A외교관을 뉴질랜드로 송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거나 혹은 이후 있을 사법절차에서 제대로 된 변호를 할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강 장관의 발언이 ‘자기 직원 지키기’에 비칠 수도 있지만 A외교관 역시 외교부가 보호해야 할 소중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발언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외교부의 설립목적 중 하나는 해외 체류 국민의 보호와 지원이고, 강 장관은 그 외교부의 수장이니깐요.

문재인(오른쪽) 대통령과 저신다 아던 총리.
다만 이와 별개로 이 사태가 왜 이렇게까지 갔느냐에 대해서는 외교부의 고질적인 보신주의, 비밀주의가 또 하나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날 외통위에서는 뉴질랜드 성추행 사건이 뜨거운 화제가 됐던 것과는 별개로 위원들은 이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여러번 외교부에 자료를 요청했으나, 개인 신상과 관련된 문제라며 거부했다고 성토했습니다. 개인신상과 상관없는 정보에 대해서도 외교부는 제출을 거절했고 심지어 이날 업무보고 자료 역시 늦게 제출했습니다.

사실 외교부의 이같은 모습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외교 관계에서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는 신중함이 오늘의 외교부 모습을 낳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모습이 피해자에게도, 또 뉴질랜드 정부에게도 그대로 비쳤다면 과연 어땠을까요.

외교부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피해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중재를 했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뉴질랜드 경찰의 체포영장 발부에도 A씨는 필리핀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외교부 역시 성추행 의도는 없었다는 그의 주장을 십분 받아들여 ‘감봉 1개월’이라는 경징계에 그쳤지요.

이같은 모습이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피해자의 분노를 오히려 부추겼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뉴질랜드 시민단체·언론·총리실 등에 메일 등을 보내 호소하며 외국정부의 외교관을 상대로 2년간 긴 싸움을 했습니다.

외교부는 뉴질랜드가 외교적 결례를 했다고 불쾌감을 표하지만,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할 정도로 뉴질랜드 여론이 부풀어 오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강 장관의 발언을 들은 지인은 “내가 만약 미국인 외교관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미국 국무장관이 내가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과하면 너무 화가 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며 풀어가려는 노력이 이 고비를 넘겨 한국과 뉴질랜드가 우호국으로서 다시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외교부는 강 장관의 공식적인 사과 이후에도 외교관 A씨에 대한 대응에 대해 “종합적인 시각에서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며 침묵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현재 외교부에 당사자 간 중재를 해달라고 다시 요청한 상태입니다. 외교부는 이에 대해서도 “검토 중이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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