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박스오피스 만든다더니…제작사는 정보 감추고, 정부는 손놨다

김현식 기자I 2024.10.30 05:40:00

[유명무실 공연전산망]②
공연전산망 KOPIS, 관객 수 등 공연별 실적 비공개
일부 제작사 반발에 구축 10년째 개선 안 돼
연간 20억 운영 예산 투입 속 유명무실 지적
투명성 제고 위한 공개 추진 요구 목소리 확산

(그래픽=이미나 기자)
[이데일리 김현식 기자] . “그 공연 정말 잘 됐나요?” 콘텐츠 전문 투자사의 투자 담당자 A씨는 뮤지컬·연극 작품 투자를 고민할 때마다 답답함을 느낀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이하 KOPIS·코피스)에서 영화 분야와 달리 관객 수, 티켓 판매액, 예매점유율 등 공연별 실적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고 있는 탓에 직접 발품을 팔아 흥행 여부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답답함을 느끼는 건 공연제작사 대표 B씨도 마찬가지다. KOPIS 공연별 실적 데이터가 베일에 감춰져 있어 투자사들이 뮤지컬·연극 업계를 폐쇄적인 시장으로 인식하고 있어서다. 이에 좋은 작품이 있어도 투자사를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운영하는 KOPIS가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 속 뮤지컬·연극 업계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뮤지컬·연극 분야는 어느덧 연간 티켓 판매액이 총 5000억원(2023년 집계 기준, 뮤지컬 4591억원·연극 630억원)이 넘는 덩치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KOPIS가 공연별 실적 데이터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어 공연예술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다. 이에 업계 안팎에서 산업 투명성 제고라는 취지에 맞는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23년 뮤지컬 티켓판매액 상위 10개 공연 명단에 오른 ‘오페라의 유령’의 한 장면(사진=에스앤코)
◇연간 20억 투입하는데…KOPIS 개선 지지부진

KOPIS는 공연예술 분야에도 영화 분야와 같은 통합전산망이 필요하다는 요구 목소리가 나오면서 2014년 구축됐다. 운영 초기에는 제작사와 티켓 판매 대행사의 참여가 거의 이뤄지지 않다가 2019년 공연법 개정으로 실적 데이터 제공이 의무화되면서 수집률을 90% 이상까지 끌어올렸다.

문제는 구축 10년째를 맞고도 공연별 실적 데이터가 아직 완전한 공개 단계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KOPIS는 전체 시장 규모와 티켓 예매액 순위 등 일차원적 궁금증을 해소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영화 분야가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을 통해 작품별로 관객 수, 티켓 판매액, 좌석 점유율 등을 상세히 공개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KOPIS에는 한해에만 시스템 운영비와 데이터 활용비로 각각 약 10억 원씩, 약 20억 원의 국고가 투입된다. 수집 데이터량이 증가함에 따라 운영비 또한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어느덧 지난 10년간의 KOPIS 운영비는 구축비를 포함해 100억 원을 훌쩍 넘어섰다. 적잖은 예산을 들여 운영하는 전산망인 만큼 조속히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일부 제작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 탓에 실적 데이터 공개 추진이 더디다는 입장이다. 공개 추진을 꺼리는 측은 작품이 관객몰이에 실패해 흥행 성적이 저조할 경우 투자 유치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을 대표적인 반대 이유로 든다. 뮤지컬과 연극은 영화처럼 개봉 시기에 단발성으로 승부를 보는 콘텐츠가 아니라 초연으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검증받은 뒤 시즌제로 공연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실적 데이터 공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 관계자는 “KOPIS 관련 공연법 시행령에 ‘공연정보제공자의 기업비밀이 공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업계와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공개를 강행할 경우 법적 분쟁의 여지가 생길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KOBIS 운영 규정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지만 내부 합의가 이뤄져 문제 되지 않는 것”이라면서 “KOPIS는 무용, 국악, 클래식 등 순수 예술 분야 공연까지 아우르는 전산망이라 뮤지컬, 연극 분야만 별도로 공개를 추진하기 애매한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2023년 연극 티켓판매액 상위 10개 공연 명단에 오른 ‘파우스트’의 한 장면(사진=LG아트센터, 샘컴퍼니, ARTEC)
◇“업계의 건강한 성장 위해 공개 추진 필요”

전문가들은 일부 제작사들의 낡은 사고방식을 깨야 업계가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눈앞의 흥행 실패를 두려워할 게 아니라 검증받은 좋은 작품들이 한층 더 수월하게 투자를 받는 건강한 구조가 만들어져야 업계가 더 큰 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지현 일신창업투자 벤처투자본부장은 “KOPIS를 통해 관객 수와 티켓 판매액을 확인할 수 있게 되면 공연별 경쟁력 파악 및 투자 의사 결정 과정이 한층 더 수월해질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작품에 참여한 배우, 창작진, 스태프들의 알 권리와 정산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서도 공개 추진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 공연연출가는 “흥행 실패로 제작사가 손실을 본 이후 임금 체불 문제가 발생하는 등의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며 “공연별 실적 데이터 공개가 이뤄진다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피해 보상 규모를 책정하는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예술경영지원센터의 미온적 움직임을 비판한다. 실험성에 초점을 맞춘 소규모 비상업적 작품을 제외한 채 티켓 판매액 상위권 작품이나 공개를 원하는 제작사 작품의 실적 데이터를 우선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 KOPIS 개선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도 문제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지난해부터 유통지원사업 선정작에 한해 관객 수와 티켓 판매액을 시범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향후 점진적으로 KOPIS의 공연별 실적 데이터 공개 범위 확대하고 이를 위한 포럼과 공청회 개최 등을 지속 추진하겠다고도 밝혔다. 김장호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는 “KOPIS가 투자 활성화 및 업계 불균형 해소에 도움이 되는 전산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이종규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은 “데이터 제공에 따른 혜택 부여 등 업계 내 다양한 주체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진행하며 강제가 아닌 합의를 통한 실적 데이터 공개를 추진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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