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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검찰개혁’의 중간목표 역시 누구에게나 똑 같은 법(Justice)의 잣대를 적용해 사람들이 정의롭게 생각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 이치란 누군가를 봐주면 다른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 최종목표는 최대다수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런데 공정을 위해 일부러 눈을 가려야 한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의 저울눈금은 오히려 흐려지고 칼날은 한쪽으로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신이 온 국민이 아닌 특정인 편을 들다가는 세상은 요지경으로 변하게 됨은 것은 뻔한 이치다.
충신이 아닌 충견(忠犬)이 되려다가는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고 나아가 조직과 사회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커져만 간다. 쉬운 예로 개화기에 ‘혈의 누’를 쓰며 신소설 장르를 개척한 수재 이인직은 을사오적 이완용의 복심이 되어 한일합방에 앞장서고 일본천황 신격화에 진력하였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이천시는 설봉산 자락 ‘문학동산’에 세워진 10인의 문학비 가운데 “이인직 외 1인의 기념비를 부수고 그 자리에 그들의 실제행적을 적은 비석을 세워 이천은 물론 민족 차원의 수치를 바로잡겠다”고 했다. 그 뛰어난 인재들이 부당하게 거머쥔 ‘순간의 승리가 영원한 패배’로 귀결된다는 이치를 어이하여 깨닫지 못했을까. 원칙을 지키며 살면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
말 끝마다 ‘국민 여러분’을 외치는 인사들일수록 올곧게 살기보다는 요기조기 힐끔거리며 곡학아세하며 괴성을 지른다. 예로부터 “어려운 일부터 먼저 한 다음에 얻는 것을 뒤에 하여야, 비로소 어질다고 할 수 있다(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 논어, 雍也)”고 했다. 그와 반대로 자신이나 주변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 들면 ‘사람이 먼저’가 아니고. ‘내 사람이 먼저’가 되어 세상을 헝클어트리며 오욕의 늪에 빠지게 된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는 인사들이 광기에 넘쳐 날뛰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자문해본다. 가진 것도 없고 네트워크도 없어서 바르게 살 수밖에 없으니 오히려 다행이란 말인가. 하여간 눈치를 살피고 아부할 재간도 없고, 재주넘을 능력도 없으니 “창파에 씻은 몸을 까마귀 싸우는 골에서 더럽힐” 까닭이야 없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