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이지스함을 만든 현대중공업 기술자들

조선일보 기자I 2007.07.08 14:37:39

미국도 놀란 한국의 ''뚝심'' 기술
"주문만 있으면 항공모함도 만든다"

[조선일보 제공] 지난 5월 25일 진수한 첫 번째 국산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은 아직 도크(dock·배를 건조하거나 수리하기 위해 물을 넣거나 뺄 수 있는 시설) 안에 있었다. 그것도 주요 장비가 들어갈 자리는 뻥 뚫린 채 비어 있거나 비닐로 덮여 있는 가운데 수십 명이 선체 곳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니 대통령까지 참석해서 화려한 진수식을 했는데 아직 완성이 안 됐단 말인가?

“배가 지상에 있을 때와 물 위에 있을 때 받는 압력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지스함은 워낙 정밀함을 요구하는 배이기 때문에 그 차이를 감안해 주요 장비는 진수한 뒤에 장착하지요. 보통 상선은 진수한 뒤 한 달 정도면 마무리 작업이 끝나는 반면 이지스함은 반년 가까이 걸려야 완성됩니다.”

이지스함 건조 총책임자인 울산 현대중공업 특수선사업부문 하용헌 전무는 “마무리 작업이 끝난 뒤에도 선체를 이지스 시스템 개발업체인 록히드마틴에 넘겨 42주간 실전 테스트를 하고 해군에는 내년 12월에 인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의 크기도 배수량 1만t 정도로 최대 7만t에 달하던 2차 대전 때의 전함에 비해 작고 미국의 이지스 시스템을 수입해서 탑재하는 것뿐인데 제작과정이 왜 그렇게 복잡할까?

“상선이 덤프트럭이라면 전투함은 세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지스 전함은 그 중에서도 첨단장비가 들어간 최고급 세단이지요. 이지스 시스템을 아무 배에나 얹는다고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CDMA칩은 외국 것이지만 그것을 상용화해서 얇은 휴대전화를 만드는 데는 또 다른 독자적 기술력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지스함 설계책임자인 김정환 상무는 “선체 설계를 잘해야 다양한 무기의 복합체계인 이지스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고 배의 생존성이 높아진다”고 덧붙였다.

김 상무는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뒤 지금까지 줄곧 군함 설계에 종사한 베테랑. 그는 경기고 2학년 때 해군사관학교에 견학을 갔다가 한 생도가 “우리나라 군함은 2차 대전 때 미군이 쓰다 넘긴 고물함정뿐”이라며 “여러분 중 누군가 꼭 국산 군함을 만들어달라”고 한 말이 계기가 돼 조선공학을 전공으로 택하게 됐다.

그 생도의 말대로 그는 1980년 진수한 한국 해군 최초의 호위함인 울산함 개발에 참여했다. 그는 “울산함이 출항했을 때는 제대로 속도가 날까, 파도에 배가 넘어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꿈의 군함이라는 이지스함을 직접 설계하고 최첨단 스텔스 기술을 논하게 됐다”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적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스텔스 설계기술은 배의 생존성을 좌우한다. 적이 쏘아 보내는 레이더 전파를 하늘과 바다 방향으로 반사시키고 특수도료를 발라 반사돼 돌아가는 레이더 전파를 최소화하는 것이 레이더 스텔스 기술의 기본 개념. 레이더 스텔스 기술을 적용하면 실제 전함의 크기보다 작은 배로 인식되거나 아예 포착되지 않는다. 세종대왕함의 레이더 스텔스 설계는 국방과학연구소와 포항공대의 전자파 전문가들과 미국의 JJMA 같은 전문 용역기관의 자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또 적의 미사일이 적외선으로 전함을 탐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스텔스 기술. 세종대왕함은 엔진에서 나오는 열을 물과 공기로 식혀 주변과 동일한 온도로 배기가스를 배출하도록 설계됐다. 또 미사일이 다가오는 것이 감지되면 즉시 배 구석구석에 달려 있는 센서가 온도를 감지해 물을 뿌려 열을 식혀주는 장치도 달았다.

조종실이나 무기 탑재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선 가벼우면서도 방탄 성능이 뛰어난 소재를 개발해야 했다. 박상철 선체설계부장은 “실탄을 직접 쏴 실험하면서 필요수준에 맞게 소재를 맞춰 나갔다”고 말했다. 포스코와 공동개발한 새로운 특수강은 초기엔 가공 노하우가 없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왕병철 생산부장은 “새 특수강의 자력이 강해 용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사내 연구소와 공동작업을 해 겨우 해결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적의 미사일과 어뢰에 피격될 경우에도 가라앉지 않고 반격할 수 있는 선체구조를 설계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도 했다. 보통 큰 배는 일부가 파손되어도 배 전체에 물이 차 가라앉지 않도록 여러 개의 격벽으로 구획을 나눈다. 격벽이 많을수록 안전하지만 선체가 무거워지고 탑재공간이 줄어들어 필요에 맞는 적절한 설계가 필요하다. ‘세종대왕함’은 적의 미사일이나 어뢰를 2~3발 맞아도 가라앉지 않고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시뮬레이션 실험을 통해 미사일이 선체에 명중돼 내부에서 폭발할 경우 몇 개의 격벽에 의해 충격을 흡수하고 나머지 공간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함 내에 장착되는 미사일 발사대는 일정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동시에 외부 충격에도 미사일이 손상되지 않도록 설계해야 했다.

이런 첨단기술이 요구되는 설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업 초기에 록히드마틴사는 일본이 이지스함을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설계도를 구입할 것을 요청했다. 스페인과 노르웨이가 이지스함을 자체 설계하면서 자주 설계를 변경하고 건조능력 부족으로 3~5년씩 사업이 연장돼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록히드마틴은 “이지스 시스템은 선체와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하므로 이미 수십 척을 건조한 미국의 검증된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은 1500명의 최정예 설계인력을 확보하고 있는 세계 1위의 조선회사로서 충분히 직접 설계를 통해 건조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시했다. 결국 그 주장이 해군에 받아들여져 약 100억원의 설계도 비용을 절약하고 한국의 기술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김 상무는 “미국의 설계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술적으로 낙후된 설계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미 배가 여러 척 나온 설계라면 설계시점이 10년 가까이 됐을 것이므로 낡은 기술에 기반한 설계라는 것이다.

배의 기본적인 설계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이지스함에 들어가는 여러 무기가 서로 호환하며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지스함의 레이더 시스템과 일부 무기는 미국산이지만 무기의 3분의 1은 국산이고 3분의 1은 유럽산이다. 이 무기들은 주고받는 명령이 서로 달라 조화롭게 운영되기 위해선 교통정리가 필요했다. 설계팀은 장비 공급업체들을 수없이 오가며 조율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지스 레이더 타워를 선체에 탑재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수백 킬로미터까지 표적을 추적하는 이지스 시스템에서는 작은 오차가 표적 근처에서는 수백 미터의 오차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민우 생산담당 상무는 “165m 크기의 배에서 120개의 블록을 쌓으면서 1㎜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고 정밀하게 레이더를 장착해야만 하는 고난도의 작업이었다”며 “우리 직원이 목수가 나무 다루듯이 철을 다룬다고 해서 ‘철목’이라 불리지만 이런 작업은 난생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업체는 자신들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다시 했다고 겁을 주며 장착기술을 구매하라고 했다.

여기에서도 현대중공업 특유의 ‘해봤어?’ 정신이 발휘됐다. 직접 기술개발을 하면 약 1000만달러의 비용을 아낄 수 있었으므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4개월간 연구를 했다. 새로운 장비를 만들고 정밀측정을 위해 야간에 작업을 했다. 소음이 있으면 계측기에 영향을 미쳐 정밀측정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김 상무는 “결국 미국보다 훨씬 깔끔하게 장착해 기술을 미국으로 역수출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이지스함에는 장치가 많아 파이프와 케이블도 기존 전함의 2배 이상 빽빽하게 들어가므로 오차 없는 작업이 필요했다. 보통 큰 배의 경우 진수한 뒤에 잘못된 배관 수정물량이 한 트럭분 가까이 나오지만 이번에는 3차원 설계를 바탕으로 정밀작업을 한 결과 수정물량이 거의 없었다. 직접 설계를 했음에도 건조 속도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빨랐다. 미국이 이지스함을 65개월 만에 만든 데 반해 현대중공업은 49개월 만에 건조를 마치는 셈이다. 이렇게 빨리 건조할 수 있었던 데는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이 작용했다. 현대중공업의 기술진이 미국에서 기술협의를 하다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을 때도 처리하는 방식부터 남달랐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한국에 이메일을 보내 문제 제기를 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자료를 찾고 연구해서 답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회의 때 답을 가지고 나가면 미국 측은 “다른 나라의 경우 돌아가서 답을 하겠다고 하고 한 달 후에나 해답이 온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지스함 제작과정에서 한국의 전함 제작 기술이 크게 높아졌다. 자체 연구로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은 수시로 기술진을 미국에 보내 기술을 얻어냈다. 이지스함 건조 이후 현대중공업 특수선사업부원들은 “주문만 있으면 이제 항공모함도 만들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전함 수출을 위한 국제적 공신력도 크게 높아졌다. 록히드마틴에서 한국형 이지스함사업을 전담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데이비드 루타 이사는 “제작기간을 단축한 한국 조선산업의 기술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앞으로 제3국의 이지스함 건조에 한국이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지스함을 만든 이들에게는 어떤 보상이 돌아갔을까? 설계·제작 책임자의 국가 포상은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많은 사업장의 임원은 포상할 수 없다’는 산업안전법 규정에 따라 취소됐다. 그들도 산업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준이 근로자가 2만5000명인 사업장과 10여명인 사업장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납득하지 못했다.

현대중공업 전체로 봤을 때도 남는 게 별로 없는 장사다. 조선 경기가 좋아 올해 1조5000억원 순이익을 내다보지만 군함 제작부서인 특수선사업부는 몇 년째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 전무는 “방위산업이 국가적 사업인 데다 회사 이미지를 높인다는 차원에서 그 동안 버텨왔지만 완전 경쟁입찰 방식으로 바뀌고 난 뒤로 출혈이 더 커지고 있다”며 “시설투자와 전문인력 유지가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시설을 놀릴 수 없어 저가입찰을 하게 되는 맹점이 있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는 수출물량을 확보해 시설유지를 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상무는 “미국은 창이 1㎝라도 길면 이긴다는 생각으로 방위산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며 “정부가 생산시설 유지에 필요한 기본 비용이라도 보장해줘야 전문인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위사업청이 생기면서 지원시스템이 원활하지 못하게 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군함의 시운전 때 대함·대공 표적 지원이 과거에는 해군을 통해 바로 가능했지만 이젠 방위사업청을 거치게 되면서 서로 업무를 미루는 관료주의의 병폐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곳곳에는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그들의 믿음에 국가의 안보가 달려 있다.

중국도 이지스함과 유사한 레이더시스템 개발

이지스함은 미국의 록히드마틴사가 만든 함대방공용 이지스 시스템을 탑재한 함정을 말한다. 이지스 시스템은 최대 1000㎞ 안에 있는 항공기나 미사일을 탐색할 수 있으며 그것을 추적해 파괴하는 전 과정을 자동화한 종합무기체계이다. 이지스 시스템은 미국·일본·스페인·노르웨이·한국 5개 나라에서 총 107대의 함정에 장착됐다. 이지스와 유사한 레이더 시스템으로는 독일·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주로 사용되는 에이팔(APAR)시스템이 있다. 에이팔은 미국의 이지스보다는 못하지만 최대 150㎞ 안에 있는 항공기와 미사일을 탐색할 수 있으며 16개 표적을 동시추적하여 함대공 미사일 32발을 유도할 수 있다.

중국도 함대방공 능력을 가진 란저우급 구축함 2척을 보유하고 있다. 이지스함과 마찬가지로 목표물의 탐색과 추적, 미사일 유도가 가능한 4면 고정형 레이더가 장착돼 있고 수직발사형 대공미사일 48발을 탑재했다. 하지만 실제적인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수년간의 시험운행과 소프트웨어 개선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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