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81) 전 외무부 장관은 최근 이데일리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한건주의나 자국·자신의 정치적 이익만 생각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연출 중심 리얼리티 쇼 외교 시대는 지났다”며 바이든 시대의 외교 정책 방향을 이같이 제시했다. 한 전 장관은 30년 가까이 고려대에서 외교학을 가르쳤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초대 외무부 장관, 노무현 정부에서는 초대 주미 대사로 외교 현장을 누볐다. 현재까지도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하며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외교 분야의 원로다.
|
한 전 장관은 한국 외교가 트럼프 정부의 ‘3무 외교’와 닮았다고 지적했다. ‘3무 외교’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이 한 언론사 기고문을 통해 트럼프 정권이 인재도, 절차도, 정책도 갖지 않고 있다고 신랄히 비판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한 전 장관은 “한국에서도 외교 주관 부서 간부나 주요국의 주재 대사 선정을 할 때 전문성이나 경험보다는 ‘코드 중심’으로 인사가 이뤄진다. 절차와 관련해 당정청 회의가 있지만 요식 행위에 그친다. 정책과 관련해서는 출구 없는 무모한 결정이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독도 방문, 문재인 정부가 한일 갈등이 악화하던 2020년 느닷없이 지소미아(GSOMIA) 종료를 발표한 것을 사례로 꼽았다. 그는 “(이들 결정이)충분한 내부적 논의와 검토 없이 취해진 조치로 알고 있다”며 “상대국을 자극만 했지 실익은 없는 행위였다”고 비판했다.
한 전 장관은 외교가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적 번영을 도모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인 만큼 앞으로의 외교는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국익을 우선으로 ‘실용적 외교’가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과 수단을 효과적으로 구사해야 한다”며 “집권자가 이념과 감정,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조언을 했다. 대통령이 바뀐 미국과의 외교에 있어서 그는 “바이든과 그의 보좌진은 상호이익과 협의를 중요시하는 프로들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미 동맹과 관련해 양국이 북한의 핵 사용에 관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는 만큼 그는 “북핵 문제 해결에 우선적으로 한국 외교 역량을 투입해야한다”며 “북핵문제는 미국이 해결하고 한국은 남북관계 개선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생각은 오산”이라고 말했다.
중국과의 외교에 있어서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원칙과 국익에 따라 일관성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국은 경제규모도 크고 북한문제도 있어 한국과 여러 측면에서 협력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경제 대국화에 동반해 중국의 대국주의가 표면화되고 있어 적절한 거리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 전 장관은 한중관계의 표본으로 싱가포르를 들었다. 싱가포르는 미국의 공식 동맹은 아니지만 안보면에서 미국과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경제면에서는 중국과 공동 프로젝트를 운영할 정도로 가깝게 지내고 있다. 그는 “싱가포르는 원칙과 국익에 입각해 강대국이라도 맞서기도, 협조하기도 하는 정책을 편다”고 설명했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65년 맺어진 한일 기본조약 및 청구권 협정부터 미흡하게 처리된 외교적 문제가 정부간의 관계 악화, 국민감정 악화로 발전하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원수에서 최고 우방으로 거듭나도록 외교를 펼친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와 샤를 드골 대통령의 사례를 들며 “무엇보다 양국 지도자들의 정치적 용기와 개방된 안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