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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루게릭병은 2~3개월의 수명연장 효과가 있는 ‘리루졸’이 유일한 치료제였지만, 신체기능 저하 속도를 70% 이상 늦출 수 있는 ‘뉴로나타-알’의 개발에 따라 루게릭병 환자들에겐 또 다른 희망이 생겨났다.
김경숙 대표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환자를 직접 치료하기보다는 의학 기술을 연구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 기초연구원에서 연구를 했다”며 “임상팀과 줄기세포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 연구를 하다가 루게릭병 치료에 사용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논의한 것이 이번 치료제 개발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논의에서 시작한 코아스템의 설립 연도는 2003년. 올해 본격적으로 치료제가 출시되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이 지났다는 것을 고려하면, 개발 과정이 절대 순탄치 않았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10평이 채 되지 않는 사무실에서 시작한 코아스템은 줄줄이 연구과제 선정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 과정에서 초기 자금을 모아 창업을 했던 몇몇 인원은는 다른 회사를 차려 나가거나 학교로 돌아가고 김경숙 대표만이 회사에 남았다. 하지만, 바이오산업을 육성하려고 하던 충청북도에서 극적으로 투자를 받은 코아스템은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김 대표는 “초기에 루게릭병 치료제를 만든다고 했을 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고, 연구과제 선정에서 다 떨어졌었다”며 “충북에서 유일하게 지원을 해주면서 응급임상과 연구자 임상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극적으로 지원을 받아 연구는 이어갔지만, 코아스템의 위기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정부에서 나오는 연구 지원금으로만 운영해 나가다보니 직원들에게 줄 임금이 부족한 경우도 있었고,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김경숙 대표 자신은 외부 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서 근무하는 등 두 가지 일을 병행하기도 했다.
또한 원료에 대한 납기일을 늦추고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도 하고, 김 대표가 개인적으로 대출을 받아 임금을 지급하는 등 자신이 정한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했다.
김경숙 대표는 “사업을 하면서 제일 절박했을 때가 자금이 부족했을 때였다”며 “직원들에게 월급은 생계를 유지하는 돈인데 미룰 순 없고 자금은 없어 마음이 타들어갈 때가 잦았고, 그럴 때면 정말 왜 이 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 고민도 됐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김 대표를 지지해준 건 직원들이었다. 회사 자금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한 직원은 자신의 적금을 해지해 운영에 사용하라고 내놓기도 했고, 3~4시까지 밤새워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역경의 시절을 거쳐 루게릭병 줄기세포 치료제 ‘뉴로나타-알’이 탄생했고, 코아스템은 752대 1이라는 뜨거운 공모 청약 경쟁률을 기록하며 코스닥 시장에 데뷔했다.
후배 연구자 및 창업자들에게 조언 한 마디를 구하자 김 대표는 ‘안정성 높은 치료제’를 만드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숙 대표는 “약은 안정성과 유효성을 꼭 평가하면서 가게 되는데, 유효성보다는 안정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며 “약표가 떨어지면 한 번 먹을 거 두 번 먹고 세 번 먹으면 되지만, 안정성이 문제가 되면 작은 회사는 단칼에 시장에서 도태된다”고 말했다.
루게릭병 치료제를 개발한 코아스템은 이제 또 다른 희귀질환의 치료를 위해 뛰어들 계획이다. 김 대표는 “우리가 배운 지식과 기술들을 이왕이면 어렵게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데 사용하는 연구공동체가 되는 것이 코아스템의 비전”이라며 “이제 시작이고, 부지런히 가다 보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의사였다가 사업가로 변신했는데,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집에서 내가 연구를 하는 것은 찬성했지만, 사업을 하는 건 크게 걱정하고 말렸다. 코아스템이 단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회사였으면 집에서 계속 말렸을 테지만, 연구를 통해 희귀질환을 앓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설득해 사업에 나설 수 있었다. 사실 투자자들의 우려가 있는 발언일 수도 있지만, 나에겐 개발이 의미가 있고 수익은 한참 뒤의 얘기다. 사업적인 일은 부사장 등 다른 파트너와 업무가 나눠져 있다.
-약을 개발할 때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갈등이 있었을 것 같은데.
△직원들에게 감사한 게 “월급 더 주세요” 하는 요청을 받은 적이 없었다. 사실 초창기엔 나도 내 월급을 가져가지 못해 따로 병원에 나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래도 가정생활이 불안하면 연구에 집중할 수 없다고 판단해 직원들의 월급을 주지 않은 적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대출을 받아 운영을 하기도 했는데, 그 사정을 아는 팀장 하나는 적금을 깨서 주기도 했다. 그 과정을 겪으니 더욱 이걸(코아스템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개발 기간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지금은 오피스텔 세 곳을 쓰고 회의실도 있지만, 처음엔 한 곳밖에 없었다. 그나마 실험 시설과 연구자 임상 시설이 다 차지하고 있으니, 10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10명이 다닥다닥 모여 일을 했다. 지금은 용인에 공장까지 있고, 한양대학교에 양산용과 임상시험용 연구개발까지 진행할 수 있는 설비를 갖췄다. 모두가 고생해 회사가 커가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루게릭병도 희귀질환이고, 다음 연구과제도 대부분 희귀질병이다. 왜 굳이 희귀질환 치료제인가.
△줄기세포 치료제의 상업적 측면을 봤다. 다른 치료제가 없는 질병이고, 줄기세포가 그 질병에 어느정도 작용을 할 것이라고 하는 가설이 있으면 우리는 바로 연구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따져보니 대부분 난치성이고 희귀질환인 게 많았다. 그리고 그 연구결과가 다른 질병에까지 적용될 수 있다고 보면 그것이 벤처기업으로서는 최적의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뉴로나타-알’의 적응증 확대를 연구하고 있다.
-줄기세포 치료 분야, 어떻게 해야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 업체가 많아져야 산업 전체가 살아난다. 관련 업체가 많이 나오는 것이 경쟁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연구가 나와야 우리의 연구도 더 촉진되는 것 같다. 희귀질환만 해도 8000개인데, 그거 우리가 다 못한다.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 업체가 더 많아져야 한다.
-여성 CEO로서 어려운 점은 없나.
△저는 골프도 못 치고, 술자리 등 대관 업무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문민정부 오면서 그런 것 없어도 서류로 증명하는 문화가 정착된 것 같고, 그래서 코아스템도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대신 좀 빡빡할 수 있지만, 투명했기에 기술성 평가를 받고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김경숙 대표는
△1965년생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한양대 의학 박사 취득 △한양대 병원 전공의 △양평길병원 임상병리과장 △한양대 의생명과학연구소 연구부교수 △선한이웃병원 진단검사의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