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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계획 하에 영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석조전은 당시 지어진 서양식 건물 중 최대 크기다. 대한제국 황제, 황후가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곳은 겉모습뿐 아니라 내부도 서양 방식을 따랐다. 화려하게 코팅된 적갈색의 목재와 황금 도색이 된 고풍스러운 영국식 가구들, 하얀 천장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코로나19로 궁 방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온라인 전시관’을 공개했다. 덕수궁관리소 홈페이지에서는 석조전 내부 모습을 가상현실(VR)영상으로 구석구석 살필 수 있다. 석조전을 살피다 보면 ‘왜 고종은 거대한 규모의 서양식 건물을 궁궐 안에 지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전문가들은 덕수궁 석조전이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한 고종의 의지가 반영된 건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석조전이 있는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해 임시 행궁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으로 사용됐지만 인조가 즉위 후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덕수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덕수궁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됐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2년여 만에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당시 덕수궁이 위치한 정동에는 11개 나라의 각국 공사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강들을 배경으로 고종은 신변 보호 및 외교를 통해 일본에 대항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덕수궁을 황궁으로서 규모와 격식을 갖추도록 중건을 명하는데 그 중 하나가 석조전이었다.
석조전은 이름처럼 돌로 지어진 건물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궁궐 전각은 나무와 흙으로 지었다. 석조전처럼 건물 전체를 돌로 짓는 것은 당시로는 파격적이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이었던 서양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음으로써 대한제국이 서구식 근대국가로 나아간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런 서양식 근대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건물 곳곳에서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장식으로 권위를 나타냈다.
조선의 전통적인 궁궐과는 다르게 접견실, 식당, 침실 서재 등 여러 용도별 공간이 한 건물에 모여 있는 것도 특징이다. 김재은 덕수궁 학예사는 “조선의 전통적인 궁궐을 보면 전각별로 서로 다른 용도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각 공간은 커튼, 카펫 등 서양식 가구들로 장식 돼 있다. 당시 적극적 외교를 펼치고자 했던 고종이 귀빈을 대접하기 가구에도 더욱 신경을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 메이플사에서 직접 공수해 온 가구들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면서 일부는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종은 실제 석조전에서 생활을 하진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석조전 공사가 끝났던 1910년 대한제국은 국권을 일본에 빼앗겼고, 고종은 이미 1907년 황제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방치되던 석조전은 1933년 덕수궁미술관, 1938년 이왕가미술관,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1955년 국립박물관 등으로 이용되며 원형의 흔적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현재의 모습은 문화재청이 지난 2009~2014년 복원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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