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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한 편의 대본이 연극 또는 뮤지컬로 무대에 오르기까지 긴 과정을 거친다. 작가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대본은 연출가·무대감독 등 제작진, 또 배우의 생각과 의견을 반영해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친 뒤 비로소 제대로 만든 공연작품으로 관객과 만난다.
작품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수정을 하며 완성도를 갖춰간다. 이 길고 긴 창작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관객과의 접점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세트나 의상, 조명 등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가 무대에 올라 대본을 직접 들고 읽는 공연을 하기도 한다. 관객 반응을 살피면서 작품을 보완하는 과정인 ‘리딩공연’이다.
△창작과정의 한 단계로 선보여
이처럼 ‘리딩공연’은 정식 공연으로 무대에 올릴지 가늠해보는 창작의 한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엔 ‘리딩공연’이 공연의 한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정식 공연이 예정돼 있지 않음에도 관객을 위한 이벤트로 리딩공연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관객 입장에선 또 다른 방식으로 무대 예술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마니아 혹은 호기심이 발동한 팬층을 중심으로 ‘리딩공연’을 찾아다니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리딩공연은 그동안 다양한 창작프로그램의 쇼케이스 형식으로 선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CJ문화재단의 ‘크리에이티브 마인즈’다. 연극·뮤지컬·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신진 창작자 발굴을 위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2010년부터 작품을 발굴해 리딩공연으로 가능성을 가늠해왔다. 뮤지컬 ‘모비딕’ ‘여신님이 보고 계셔’ ‘더 넥스트 페이지’ ‘아랑가’ 등이 ‘크리에이티브 마인즈’로 관객과 만났다. 그중에서 오는 3월엔 2015년에 리딩공연으로 올린 뮤지컬 ‘판’을 정식으로 무대화할 계획이다. CJ문화재단은 “젊은 창작자의 작품을 다양한 연령의 관객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상업화 가능성을 검증한다”고 리딩공연을 올리는 배경을 설명했다.
두산아트센터도 ‘두산아트랩’을 통해 리딩공연을 선보여 왔다. 작가 김은성의 연극 ‘목란언니’도 그중 하나다. 2011년 ‘두산아트랩’에서 리딩공연을 올린 ‘목란언니’는 이후 1년 동안 결말을 수정하는 등 작품을 다듬어 2012년 정식으로 무대에 올려 좋은 평가를 받았다. 강소정 두산아트센터 매니저는 “‘두산아트랩’의 리딩공연은 본 공연을 만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며 “리딩공연 외에도 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두산아트랩’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공립예술단체도 리딩공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국립극단의 ‘작가의 방 낭독극장’과 ‘예술가청소년창작벨트’, 서울시극단의 ‘창작플랫폼’, 서울연극센터의 ‘뉴스테이지’와 남산예술센터의 ‘서울희곡페스티벌’ 등이 대표적이다. 극장에서 직접 레퍼토리 개발을 위해 리딩공연을 진행하는 사례도 있다. 대명문화공장은 극장용 장기 레퍼토리 개발을 위한 ‘공연, 만나다 동행’을 꾸리고 있다. 연극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뮤지컬 ‘구부러져라 스푼’, 뮤지컬 ‘보이즈 인 더 밴드’의 리딩공연을 오는 2월에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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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이벤트로 새로운 즐거움
기존 리딩공연은 신진 창작자를 위한 쇼케이스 성격이 컸다. 그러나 최근엔 관객 이벤트로도 선보인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미드나잇’은 지난달 13일 대학로 미송아트홀에서 ‘테이블 리딩회’란 이름으로 리딩공연을 펼쳤다. 배우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대본을 읽고 노래를 부르는 이색무대였다. 관객은 추첨을 통해 초대했다.
작품의 홍보를 담당하는 기획사 랑의 조수곤 차장은 “공연 전 관객에게 이벤트 형식으로 작품을 알리기 위해 행사를 기획했다”며 “‘미드나잇’은 연극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이다. 메시지와 스토리를 리딩공연으로 알려주는 것이 작품을 소개하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 리딩공연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참석한 관객도 정식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덧붙였다.
뮤지컬 ‘빨래’로 잘 알려진 연출가 추민주의 신작 연극 ‘에덴미용실’도 올 하반기 정식공연을 앞두고 지난달 27일 동양예술극장에서 리딩공연을 가졌다. 제작사 씨에이치수박은 “정식공연 이전에 작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리딩공연을 기획했다. 작품을 소개하며 관객반응을 미리 확인하는 자리였다”며 “관객 반응을 참고해 오는 10월 정식으로 공연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에덴미용실’의 리딩공연은 전석 5000원의 저렴한 티켓가격으로 진행했다. 수익금 전액은 사회복지단체인 밥상공동체 연탄은행에 기부해 의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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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공연이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리딩공연에 오른 작품이 정식공연으로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리딩공연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정식공연에선 아쉬운 반응을 얻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초연한 뮤지컬 ‘아랑가’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그렇다.
김창화 상명대 연극학과 교수는 “리딩공연은 연극의 공연적인 측면이 아닌 문학으로서의 기능과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복고적인 느낌이 있다”며 “제작비 등의 문제로 정식공연을 할 수 없는 경우 리딩공연은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리딩공연은 독자로서의 문학적 상상력은 극대화할 수 있지만 관객으로서의 연극적 상상력은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창작자에게도 리딩공연은 ‘양날의 검’과 같다. 창작의 기회를 마련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창작의 기회를 빼앗기는 경우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정 극작가는 “리딩공연도 하나의 장르처럼 변해가고 있다. 희곡 창작을 활성화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기를 부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공연은 배우에 의해 바뀌기도 하고 연출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리딩공연 만으로 작품의 완성도와 관객 호응도를 재단해 무대화하지 못하고 작업이 멈춘다면 창작자 입장에선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