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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와 마사코를 사랑한 이중섭, 무대로 불러내다

김미경 기자I 2016.09.08 06:30:37

연희단거리패 연극 ''길 떠나는 가족''
탄생 100년·타계 60년 기념 제작
비운한 천재화가 삶 일대기로 그려
그림 속 소재 오브제로 표현
민요·트로트 접목 이색 무대
6일 이중섭 기일 맞춰 추모제 열기도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1916∼1956)의 삶을 담은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이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무대에 오른다. 이중섭 역을 배우 윤정섭이 6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에서 연 시연회에서 열연하고 있다(위). ‘길 떠나는 가족’은 1954년 이중섭이 그린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데 극중 마지막 장면이 이를 재현했다(오른쪽 위·아래). 왼쪽 아래는 잠시 행복했던 일본인 부인 야마보토 마사코와의 결혼식 장면(사진=연희단거리패).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한국서 예술가로 산다는 건 뭘까. 많이 고민했다. 힘들다. 정말 힘들거든. 상업주의와 몰이해, 시기와 질투, 억압….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싶더라. 이를 다 겪은 이중섭은 희생자란 생각이 들었다. 쓸모없이 버려졌지만 그는 불멸의 상상력을 남겼다. 바로 이것이 한국적 상황을 견뎌낸 예술가의 존재방식이다.” 연출가 이윤택(64·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감정이 북받쳤는지 이따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러나 눈빛에는 결연함을 넘어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6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이날 무대에선 이중섭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의 시연회에 앞서 화백을 추모하는 제를 올렸다. 이 감독은 떨리는 목소리로 ‘제문’을 읽었다. 그는 “연극쟁이 이윤택이 환쟁이 이중섭 영전에 고한다”고 운을 뗀 뒤 “당신이 살아낸 기억은 개인의 기억을 뛰어넘어 역사가 된다. 예술이 예술답게 존재하지 못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이 세속적인 세상에서 선생을 기억하며 견뎌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정확하게 60년 전인 1956년 9월 6일. 화가 이중섭(1916~1956)은 서울 적십자병원의 차가운 병실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일본으로 보낸 부인 이남덕(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과 두 아들 태현·태성을 그리워하며 술로 연명하다가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마흔 살에 요절했다. 시신은 사흘간 무연고자로 방치됐다.

천재화가 이중섭의 기일(1956년 9월6일)인 6일 오후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열린 연극 ‘길 떠나는 가족’ 시연회에 앞서 이윤택 연출이 제문을 읽고 있다(사진=뉴시스).
◇‘연희단거리패’답게 그린 화가 이중섭

무대는 곧 캔버스였다. 배우가 점을 찍으면 오브제가 선을 긋고 조형물이 면을 채웠다. 마치 이중섭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이중섭의 장례일이던 10일에 개막해 25일까지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 오르는 ‘길 떠나는 가족’은 올해 타계한 극작가 김의경이 대본을 쓰고 이 감독에 의해 1991년 초연했다. 2001년 서울시극단에 이어 2014년 명동예술극장이 다시 선보인 뒤 2년 만에 앙코르다. 연희단거리패 제작으로는 처음이고,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첫 연극 작품이기도 하다.

이 감독은 2년 전 명동예술극장의 ‘길 떠나는 가족’이 대중적이었다면 연희단거리패의 이번 작품은 좀더 실험적이라고 했다. 이 감독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다시 민간 극단의 품으로 들어온 만큼 좀더 연희단거리패다운 작품을 보여주려고 한다”면서 “합숙하는 극단인 만큼 배우들의 움직임을 더욱 세밀화했다. 서사보다 미장센을 보여주고 싶었다. 말뿐만 아니라 소리·노래·음악이 자유롭게 뒤섞이는 그런 연극을 꿈꾼다”고 말했다.

장치 대신 진짜 살아 움직이는 상징이 무대를 채우는 식이다.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소, 아이들, 물고기, 새 등 이영란 미술감독의 오브제가 이중섭의 예술세계를 생생히 표현한다. 또 서도민요와 트로트풍 노래는 낭만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무대구성에 힘을 싣는다. 우리의 호흡이 담긴 고유음악에 다양한 장르 결합을 시도하는 김시율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3번째 이중섭을 연기한 ‘배우 윤정섭’

“너는 세상에 아무 쓸모 없는 놈이다. 네 그림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네 그림이 엉터리, 가짜니까.” “배가 고파 게를 많이 잡아먹다 보니, 게에게 미안해 많이 그리게 됐다.” “세상에 환쟁이가 할 일이 뭔가. 난리가 나니 무용지물이야. 평화를 외치고 전쟁을 미워하고 자유의 값을 알고 사랑할 줄 안다 해도 환쟁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역대 이중섭 역을 맡은 배우 김갑수(왼쪽부터), 지현준, 윤정섭.
뛰어난 재능에도 불우한 삶을 산 이중섭을 연기하는 배우는 윤정섭이다. 1991년 김갑수, 2014년 지현준에 이어 바통을 받았다.

이 감독은 윤정섭에게 “울지마라, 냉철하라”고 주문했다고 귀띔했다. 이 감독은 “2년 전 지현준이 연기한 이중섭은 많이 울었다. 낭만적이었다. 이번에는 좀 더 현실적으로 냉철하게 다가가고 싶었다”고 했다. 윤정섭은 일본 여인과의 결혼, 1·4후퇴로 인한 남하, 정신병원에서의 죽음 등 예술가를 억압하는 시대상황과 가난이란 극한 상황에서도 치열한 예술혼으로 맞선 이중섭의 삶을 김소희·오동식 등과 호흡하며 제대로 표현해낸다. 혼신의 힘을 다해 억압당하는 현실을 절제된 연민으로 그려내 관객의 공감을 이끈다. 전라노출은 물론 직접 그림을 그리는 연기도 감행한다.

윤정섭은 “나라는 사람과 닮지 않고 다른 삶을 산 천재 이중섭을 연기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며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배우니까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체력소모가 많지만 그런 땀방울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이중섭에게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파란만장 무대 연희단거리패 30주년

연극 ‘길떠나는 가족’의 한장면(사진=연희단거리패).
이중섭의 삶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작품은 공연 때마다 이중섭의 그림을 연극적으로 재현해 화제를 낳았지만 늘 공연여건이 녹록지 않았단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이 작품으로 지난 4월 콜롬비아 이베로아메리카노 연극페스티벌에 참여하려 했는데 항공료 지원이 안 나와 취소했다. 그런데 주최 측에서 표도 잘 팔리고 유일한 한국작품이니 꼭 와달라고 해 결국 가장 싼 항공권을 구입해 힘들게 다녀왔다”며 “5회 전회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웃었다.

서울 공연도 큰 무대를 찾기가 어려웠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스파프)도 작품을 출품했다가 떨어졌다고 했다. 김 대표는 “지난 3월 밀양을 시작으로 5월 대전·대구·제주에서도 작품을 찾아줘 공연했다. 7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찾은 윤호진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이 개막작으로 오른 작품을 본 뒤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줘 이중섭 기일에 맞춰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아 10월 말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근처에 ‘30스튜디오’를 개관한다. 극단이 운영 중인 게릴라극장이 대학로 소극장을 이어왔다면 30스튜디오는 극장에서 나아가 금·토·일 사흘간 여는 소통공간을 지향한다. 10월 28일 일본극단청년단 ‘서울시민 1919’(히라타 오리자 작·연출)을 개관작으로 올린 뒤 주요 레퍼토리인 ‘오구’ ‘백석우화’ 등을 연달아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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