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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차원 평면에 구현된 회화라는 장르에 현대미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오늘날의 회화는 고작 풍경화에 쓴 추상적 표현을 이유로 평론가 존 러스킨이 ‘대중에게 페인트통을 던졌다’며 제임스 휘슬러에게 핏대를 세우던 100년도 전의 시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현대미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회화 역시 과거와는 다른 ‘동시대’의 질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내외를 막론하고 안면의 노골적 변형을 담아내는 초상 스타일의 유행은 회화에 반영된 현대예술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그 가운데 복잡한 색상 조합으로 마치 모자이크를 보는 듯한 앤드류 살가도(캐나다)의 초상화는 비교적 온건한 편에 속할 것이다. 그에 비해 누군가의 얼굴을 붓으로 난도질한 듯한 느낌을 주는 안토니 미칼레프(영국)의 그림은 좀 더 도발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더 나아가 성화를 연상시키는 바로크 풍의 그림에 훼손을 가한 니콜라 사모리(이탈리아)의 작품에는 신성모독의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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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호는 다양한 인물의 안면상을 대형 캔버스에 왜곡된 형태로 묘사하는 방식의 작업을 해왔다. 채택되는 왜곡 방식 역시 선형, 패턴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동원된다. 배경 채색을 하지 않아 스케치까지 그대로 두는 것은 물론, 붓질의 흔적을 넘어 안료의 덩어리마저 두껍게 남기는 신광호의 작업방식은 전시장 한 켠에 비치된 작가의 작업 도구를 통해서도 강조된다.
그래서 신광호의 얼굴들은 확장된 자아의 폭발을 주제화한 것일 수도 있고, 거꾸로 사회적인 고립에 무너지는 개인의 내부분열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눈, 코, 입조차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그림 속 인물들은 복잡한 표정으로도 담아내기 힘든 감정을 보는 이들에게 전달한다.
사실 왜곡된 인체를 소재로 하는 작풍은 멀리는 에곤 실레부터 가깝게는 루시언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표현주의적 인물화의 전통을 잇는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 독일의 초기 표현주의자들이 선보인 과격성을 감안하면 요즘 초상화들은 비교적 시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초상의 경향을 반길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괴팍한 취향에 아주 큰 거부감만 없다면, 신광호의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조형적 쾌감이 작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그림이 과거의 명작이 가져다주지 못하는 ‘동시대성의 체험’을 제공한다는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