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신중섭 기자] 역사 자료를 통해서라도 추운 겨울 냇가에 쪼그려 앉아 얼음물에 빨래를 담그고 방망이를 두드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한 번쯤은 본 적 있을 겁니다. 아주 먼 옛날 일 같지만 불과 1970년대만 해도 이런 일은 흔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세탁기 보급률은 1%에 불과했고 가정마다 수도가 제대로 보급되지도 않아서였죠. 매일같이 쌓이는 빨래는 어머님들의 최대 ‘적(敵)’이었습니다. 집 안 청소와 설거지도 이에 비할 것이 아니었죠. 가사노동을 획기적으로 줄인 혁명적인 가전제품 ‘세탁기’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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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세계 최초’가 확실한 다른 가전제품과 달리 세탁기는 그 시초가 명확하진 않습니다. 다만, 18세기 중반부터 세탁기를 만들려는 시도가 활발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대적 개념의 세탁기는 19세기 중반인 1851년 미국의 발명가 제임스 킹이 발명했습니다. 드럼식 세탁기의 전신인 ‘실린더식 세탁기’로, 반복적 피스톤 운동에 의한 압축공기로 세탁과 헹굼, 탈수 작업을 하는 수동식 세탁기였습니다.
이후 1858년에 해밀턴 스미스가 회전식 세탁기로 최초의 특허를 받고, 1874년엔 월리엄 블랙스톤이 아내의 생일 선물로 손으로 돌리는 세탁기를 발명하며 최초의 ‘가정용 세탁기’가 탄생합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주로 보급된 세탁기는 핸들을 직접 돌려 세탁을 하는 수동식 세탁기였는데요, 마침내 1908년 아버 피셔가 전기모터가 달린 드럼통 세탁기를 발명합니다. 이후 1911년 미국 가전업체 메이택이 판매용 전기세탁기를 내놓고, 월풀이 자동세탁기를 판매하며 전기세탁기가 본격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월풀이 1911년 내놓은 세탁기가 자동세탁기라곤 하지만 요즘 세탁기의 모습과는 거리가 꽤 멀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나온 제품이었으니까요. 모양이 무슨 상관일까요, 가사노동의 부담을 줄여준 세탁기는 20세기 초반 급속히 확산하기 시작합니다. 국내에선 손빨래를 할 때 1941년 미국에선 전체 가정의 52%가 세탁기를 보유할 정도였습니다.
1937년 미국 업체 벤딕스는 완전히 자동화된 세탁기를 개발한 데 이어 1947년 앞쪽에 있는 문으로 세탁물을 넣고 빼는 세탁기를 내놓습니다. 요즘 나오는 드럼 세탁기와 유사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이죠. 이후 세탁 통과 탈수 통이 구분된 형태의 ‘2조식 세탁기’와 한국에선 ‘통돌이’라고도 불리는 ‘와류식 세탁기’, 드럼 중간에 날개가 달린 봉이 돌아가며 물살을 일으키는 ‘교반식 세탁기’ 등 다양한 세탁기가 등장합니다. 1970년대에는 세탁기의 모터 속도를 전자로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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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세탁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건 1970년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이전에도 미국 세탁기를 들여오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죠. ‘국내 최초 세탁기’ 타이틀을 가져간 건 LG전자(066570)의 전신인 금성사였습니다. 1969년 금성사가 내놓은 세탁기의 이름은 ‘백조세탁기’로 용량은 1.8㎏이었습니다. 알루미늄으로 제작됐으며 2조식 수동 세탁기 형태였습니다. 삼성전자(005930)도 향후 세탁기 시장이 커질 것이라 예상하고 1974년 펄세이터 방식을 차용한 2㎏ 용량의 수동형 2조 세탁기 ‘SEW-200’을 선보입니다.
국내에서 사치품으로 여겨지던 세탁기는 1970년대 국민 생활 수준이 점차 향상되며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중심으로 가전 업체들의 ‘세탁기 전쟁’도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LG전자는 1978년 국내 최초 2조식 자동세탁기 ‘WP-2580A’, 1981년에는 국내최초 애벌빨래가 가능한 2조식 세탁기 ‘WP-251T’를 내놓은 데 이어 1996년 국내 최초 통돌이 세탁기를 출시하며 국내 세탁기 시장을 주도합니다. 미국 가전업체들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1998년 세계 최초로 DD모터를 적용한 통돌이 세탁기를 내놓는 등 새 역사를 씁니다.
삼성전자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삼성전자는 1983년 5만 개 구멍이 있는 샤워파이프에서 강력한 물을 분사하는 형태의 샤워린스 자동 세탁기 ‘SEW-3035’를 출시했고, 1993년엔 일명 ‘신바람 세탁기’(모델명 ‘SEW-9090’)를 출시합니다. 세계 최초로 로스비 캡을 적용해 세탁물의 엉킴 현상을 획기적으로 개선, 주부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죠.
2015년엔 LG전자가 전자동과 드럼 세탁기를 한데 모은 ‘트윈워시’ 세탁기를 출시했는데, 주문이 폭주해 비행기로 운송할 정도였습니다. 세탁기가 보통 선박으로 운송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 일이었습니다. 삼성전자 역시 2015년 세탁조 위에서 애벌빨래가 가능토록 한 ‘액티브워시’를 출시, 1년 2개월 만에 전 세계에서 200만대를 판매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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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두 회사의 치열한 경쟁 덕분에 1970년 1%에 불과했던 국내 세탁기 보급률은 1985년 26%, 1993년 보급률 91%를 기록합니다. 현재는 95%를 넘어서고 있죠. 특히 두 회사의 세탁기는 세계 가전 시장의 최대 격전지이자 세탁기 종주국인 미국 시장을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2017년 월풀의 청원을 계기로 2018년 2월7일 미국이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를 발효할 정도였죠. 시장조사업체 ‘트랙라인’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삼성과 LG 모두 20~21% 수준으로 선두를 다투고, 월풀이 14%대로 두 업체를 쫓고 있습니다. 900달러 이상 프리미엄급 제품에선 삼성과 LG의 점유율이 30%에 육박했죠. 최근 10년간 미국 내 세탁기 특허출원 순위에서 LG전자와 삼성전자가 각각 1, 4위를 차지하며 기술력까지 압도하고 있습니다.
최근 세탁기는 인공지능(AI)까지 탑재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비스포크 그랑데 AI는 옷감의 무게, 종류와 오염도 등에 따라 세탁부터 탈수까지 맞춤으로 동작합니다. 세탁물 중 섬세한 소재 비중이 높으면 버블펌프 동작을 강화하고 모터 회전은 줄여 옷감을 보호하는 방식이죠. LG전자의 트롬 씽큐 세탁기 역시 인공지능 DD 기술로 의류 재질과 무게에 따라 맞춤 세탁을 진행합니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위아래로 붙어 있는 형태의 일체형 제품도 두 회사의 인기 제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