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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상공연] 바흐, 순수의 재발견

문화부 기자I 2013.09.09 08:19:25

- 심사위원 리뷰
''킴 카쉬카시안 비올라 리사이틀
기교 없이 있는 그대로의 악기소리 구현
그윽한 ''바흐 모음곡'' 인생 묘사한 듯

비올리스트 킴 카쉬카시안(사진=크레디아)


[류태형 심사위원] 깊은 밤 촛불 하나가 오두막을 가득 채우듯 비올라 한 대가 홀을 가득 채웠다. 현존하는 최고의 비올리스트 킴 카쉬카시안의 독주회가 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렸다. ECM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개최된 이날 공연은 죄르지 쿠르탁의 ‘비올라를 위한 사인, 게임, 그리고 메시지’ 1부와 2부, 그리고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과 2번을 연주하는 단출하면서도 대담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카쉬카시안이 무대에 등장했다. 검정색 투피스에 머리를 묶은 빨강끈으로 액센트를 준 그녀의 표정은 풋풋했다. 첫 곡은 쿠르탁의 ‘비올라를 위한 사인…’ 1부. 헝가리 작곡가 쿠르탁이 1989년에 작곡을 시작해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현재진행형 작품이다. 개별 연주자에 맞춰 끊임없이 수정하고 있는 이 곡에는 음악의 역사가 지나간다. 중세음악의 선법과 바흐, 프레스코발디를 거쳐 버르토크와 리게티, 존 케이지에 이르기까지 서양음악의 전통과 형식, 선배와 동료 작곡가들의 작품을 실험하고 재해석하는 ‘음악적 일기장’이다.

카쉬카시안의 연주는 마치 유럽의 예술영화를 감상하는 듯했다. 약음기를 끼고 명상적인 악구를 연주할 때는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불빛 같았다. 고음을 강조하며 유령이라도 나올 듯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짧은 한 곡을 끝낼 때마다 마지막 활을 그은 곳에 여전히 음악이 가시지 않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쏟아지는 갈채를 받고 카쉬카시안은 퇴장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을 연주했다. 그녀가 비올라로 연주하는 바흐의 모음곡은 춤곡이라기보다는 삶의 묘사와도 같이 느껴졌다. 프렐류드는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알르망드는 비올라 특유의 빛바랜 고음으로 미스터리와 긴장감을 불러왔다. 쿠랑트는 가장 무곡에 가까웠으며 미뉴에트는 현을 그을 때의 그윽한 여운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지그는 첼로에 비해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비올라의 존재감을 잘 보여줬다.

휴식시간 후 2부에서는 쿠르탁의 ‘비올라를 위한 사인…’ 2부가 이어졌다. 극적인 보잉과 피치카토를 선보이다가 역시 약음기를 끼고 하강하는 악구를 연주했다. ‘존 케이지에의 오마주’에서는 의문부호의 연속 같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듣는 이를 안내했고, ‘무궁동’에서는 단속적인 빠른 악구를 연주했으며, ‘사인’ I과 II에서는 활을 바꿔서 귀신의 소리같은 기괴함과 피치카토를 쓴 다양한 표현을 선보였다.

1부와 마찬가지로 청중의 갈채 후 카쉬카시안은 약간 튜닝을 하더니 곧바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을 시작했다. 프렐류드는 어쩐지 현대적이고 비극적이었다. 알르망드는 산길을 걷는 듯한 장면이 연상됐다. 쿠랑트는 효과적인 표현이 돋보였으며 사라방드에서는 첼로에 비해 결코 결이 약하지 않은 존재감이 그녀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선보였다. 미뉴에트 I과 II에서는 편안해보이는 보잉으로 곡을 견인했다.

그냥 보내기 싫다는 듯 뜨거운 박수 속에서 카쉬카시안은 앙코르로 자신의 혈통인 아르메니아 민요를 연주했다. 청중의 집중과 침묵 위로 구슬픈 정서가 떠다녔다.

카쉬카시안의 음색에서는 예쁘게 꾸미거나 가공한 인공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있는 바람을 맞고 세월에 숙성된 있는 그대로의 비올라 음이었다.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라는 ECM의 구호가 비올라의 음으로 현현되는 것 같았던 연주회였다.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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