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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눈 멀자 도시 눈 뜨다

오현주 기자I 2012.10.29 09:04:20

육근병 14년 만의 개인전 ''비디오크라시''
일민미술관 12월 9일까지
녹슨 철제 원통에 달린 ''눈''
''인간은 정당한가'' 질문 던져

육근병의 ‘서바이벌 이즈 히스토리(Survival is History)’(사진=일민미술관)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육근병(55). 그는 비디오 아티스트다. 설치형식으로 비디오 조형작업을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대단한’ 국제적 명성을 이끌었다. 1989년 상파울루비엔날레, 1992년 카셀도쿠멘타, 1995년 리옹비엔날레에 초대받은 것과 맞물려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무엇보다 카셀도쿠멘타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미술계에도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아티스트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나 꿈꾸는 그곳에 백남준에 이어 한국작가로는 두 번째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카셀 메인 전시장 앞에 거대한 철기둥을 세우고 껌뻑거리며 서로 마주보는 ‘눈’ 영상을 쏘아 올렸다. 극찬이 쏟아졌다. 엄청난 파장과 함께 각국의 전시요청도 쇄도했다. 급기야는 백남준을 이을 재목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것이 족쇄가 됐다. 그는 이후 혹독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1998년 개인전 오디오 비주얼 ‘생존을 위한 꿈’을 끝으로 국내에선 더 이상 작품 활동에 나서지 못한다. 한때는 ‘사망설’까지 나돌았다.

서서히 잊힌 작가로 14년. 그가 ‘살아서’ 돌아왔다. 그것도 보란 듯 서울 한복판으로 입성했다. 비디오에 의한, 비디오로 하는 정치라는 거대한 의미를 담은 ‘비디오크라시(Videocracy)’를 타이틀로 내걸고 대규모 개인전으로 회생을 알렸다. 미술관급 전시로는 처음이다.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 1~3층 전관을 채웠다. 그것도 모자라 전시장 밖으로까지 진출했다. 녹슨 철제 원통에 눈을 달아 도시를 엿보게 한다.

육근병, 그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신작들이 나왔다. 오디오·비디오 설치작품과 퍼포먼스 영상작품 5점을 앞세우고, 작품을 설명해주는 드로잉과 영상, 사진과 자료들을 덧붙였다. ‘트랜스포트(Transport)’는 작품을 운송하는 나무상자에 영상을 접목했다. 공중에 매달린 나무상자엔 열 살 차이의 남녀 12명과 양평 작업실 부근의 들꽃 12가지 이미지를 교차시켜 생명의 오묘함을 뿜게 했다. 사람과 물이 양립하는 2채널 영상도 있다. 종말을 뜻하는 ‘아포칼립스(Apocalypse)’다. 물은 늘 아래로 흐르지만 사람들은 되레 순리를 거스르며 뒤로 걷는 형국을 대비했다.

육근병 작업의 핵심은 눈이다. 그 눈을 통해 그는 근대적 시각성에 지지기반을 둔 인간들의 인식·권력·문명의 정당성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원형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눈은 항상 의구심에 찬 움직임을 보인다. 눈이 들어있는 지점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주체와 대상, 동과 서, 전통과 현대 등 그의 눈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어느 곳에든 닿아 있다.

눈을 대표하는 그의 작품은 ‘서바이벌 이즈 히스토리(Survival is History)’. 전시장 밖에 덩그러니 놓인 이 철제 원통은 길이 600cm에 달하는 몸통에 지름 230cm에 이르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 커다란 눈은 밤마다 광화문 사거리를 휘감으며 도시와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을 내다본다. 1995년 리옹에서 선보인 적이 있는 이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건 처음이다.

10여년간 준비해온 ‘눈’ 프로젝트의 준비 과정도 살필 수 있다. 내년 미국 뉴욕 유엔본부 외벽에 내걸 대형 비디오 아트 프로젝트다. 190여개국 어린이들의 눈을 촬영해서 얻은 모자이크 영상을 투사하는 작업이다.

어찌 보면 ‘서바이벌 이즈 히스토리’는 작가 육근병을 움직인 암시가 됐다. 살아남는 것이 곧 역사였다. 12월 9일까지. 관람료 2000원. 02-2020-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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