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 김포비행장으로 지은 김포공항, 1963년 서울로 이사
옮겨간 게 아니라 김포 일대 서울 편입 결정으로 주소 변경
애초 양천군에서 김포군→영등포구→강서구로 변천한 지역
김포 방화리는 방화동, 송정리는 송정역 각각 이어져 명맥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김포국제공항(김포공항)의 전신은 김포비행장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던 1939년 군용 비행장으로 쓰려고 지었다. 당시 김포군(1998년 시 승격) 양서면 방화리와 송정리 일대였다. 중일전쟁에 대비하려면 서울 서쪽에 자리한 김포는 최적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너른 김포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활주로를 내기에도 거침이 없었다. 방화리(傍花里)는 근처 사철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개화산에 인접한 동네라서 이름 붙었고, 소나무가 우거진 동네는 송정리(松亭里)라고 불렀다.
| 지난 2일 경기 김포시 한 도로에 ‘김포시→서울편입 공론화’를 환영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다.(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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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폐망하고 미 군정이 들어서면서 김포비행장은 미군이 썼다. 한국전쟁을 거치고 1954년 처음으로 민간 항공기가 취항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항공사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역할을 맡았다. 이윽고 1957년 국제선이 들어서고 이듬해인 1958년, 드디어 김포비행장은 김포국제공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김포공항이 서울로 옮겨간 때는 1963년 1월이다. 아니, 옮겨간 게 아니라 서 있는 곳이 서울이 되면서 주소가 바뀌었다. 국회가 법률을 바꿔서 김포군 일부를 서울로 편입시킨 데 따른 결과였다. 당시 서울은 몰려드는 사람과 자본으로 몸살을 앓았다. 자연히 외연을 키워야 하는 시기였다. 이후 김포공항은 서울시 영등포구 공항동(행정동)에 자리하게 됐다.
서울은 밖으로 팽창하면서 안에서 분할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1977년 영등포구가 쪼개지고 공항동을 포함한 서울 서쪽이 강서구로 분할됐다. 행정동으로서 공항동은 공항동, 오곡동, 오쇠동, 과해동 등 네 개 법정동으로 구성된다. 공항동은 말 그대로 김포공항을 품은 데에서 유래했다. 오곡동(五谷洞)은 다섯 개 골짜기 사이에 있는 마을이어서, 오쇠동(五釗洞)은 쇠노(기계식 활)를 만들던 다섯 사람이 살고 있어서, 과해동(果海洞)은 마을 생김이 서해로 뻗어 가는 오이 모양과 닮아서 각각 이름 붙었다.
| 지난 1일 오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활주로에서 아시아나 여객기가 이륙하고 있다.(사진=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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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까지는 경기 양천군(지금의 서울시 양천구) 가곡면이던 이 지역(김포공항)은 일제시대 경기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1914년)로 지정되고, 산업화 시기 서울 영등포구 공항동(1963년)을 거쳐 강서구 공항동(1977년)이 돼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는 김포공항에서 경기 김포 땅은 한 줌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 강서구가 대부분이고 외려 인천 계양구 상야동 상당 규모와 경기 부천시 고강동이 약간 포함돼 있을 뿐이다. 예전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는 강서구 방화동으로 바뀌었다. 송정리는 서울 강서구에 있는 지하철 5호선 송정역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