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은행이 파산될 때 손실을 부담하도록 설계된 보완자본인 후순위채의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서 주요 국가들은 파산상태에 다다른 상당수 은행들에게는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만일 은행이 파산됐다면 후순위채 투자자는 손실을 떠 앉았어야 했지만 정부지원으로 은행이 구제되면서 후순위채 투자자는 조금의 손실도 부담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바젤은행감독위원회(이하 바젤위원회)는 바젤Ⅲ 자본규제의 도입을 통해 은행으로 하여금 더 많은 자본을 쌓게 하는 동시에 추가로 조건부자본 규제를 마련했다.
`조건부 자본(contingent capital)`이란 손실을 즉시 흡수할 수 있는 자본과는 달리 사전에 조건부 자본 발행요건에 명시된 위기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주식으로 전환되도록 설계된 증권을 말한다. 즉 발행형태는 채권이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주식으로 바뀌게 되는 채권과 주식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 증권이다.
바젤위원회는 주식 이외의 자본으로 인정되는 후순위 채권에 대해 조건부자본의 속성을 의무적으로 갖추도록 했다. 후순위 채권이 손실을 부담토록 하는 시점을 청산시점 이전으로 앞당김으로써 위기 발생 시 은행이 생존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렇게 되면 부실은행에 대해 공적자금 투입이 불가피한 경우 그 규모를 최소화시킬 수 있어 납세자 부담이 완화된다. 또한 손실부담 리스크가 더 커진 조건부자본 투자자들에게 은행경영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감시토록 하는 유인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과연 조건부자본의 도입으로 위기에 처한 은행이 구원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조건부자본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가상적인 예를 들어보자.
한강은행(가칭)은 최근 대출 부실화에 따른 대규모 손실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크게 하락했다. 자본조달(주식 발행)을 통해 회생을 도모하고자 하지만 신인도가 떨어져 시장에서 한강은행의 주식을 사려는 투자자를 찾기가 어렵다.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파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감독당국은 조건부자본의 주식전환을 결정한다. 이제 내부적으로 양질의 자본이 확충된 한강은행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갖는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조건부자본은 선발투수(=은행 자본)가 체력 고갈로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등판하는 `구원투수`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스위스의 크레디트 스위스 외에 영국의 로이즈은행(Lloyds Banking Group), 네덜란드의 라보은행(Rabobank) 등이 이미 조건부자본을 발행했다.
바젤위원회의 결정으로 향후 국내에도 조건부자본 규제 도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고위험 상품인 조건부자본에 대한 시장수요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외국 사례에서처럼 기존의 후순위채에 비해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새로운 금융상품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투자자층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만약 발행이 순조롭다 하더라도 은행들이 조건부자본을 일종의 보험으로 간주해 과도하게 리스크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구원투수가 경기를 항상 승리로 이끌 수 없듯이 조건부자본이 위기에 봉착한 은행을 구원하는 역할을 매번 수행할지 여부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바젤Ⅲ의 새로운 조건부자본 규제에 대비해 감독당국 및 은행들의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