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자녀 양육을 위해 6년 동안 전업주부의 길을 걸었지만, 그게 오히려 수백배 값진 보물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다국적 제약회사 ‘한국스티펠’의 권선주(59) 사장은 평범한 전업주부에서 제약회사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한 여성이다. 19년째 한국스티펠을 이끌고 있는 권 사장은, 제약업계의 ‘장수(長壽) CEO’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지난 74년 서울대 약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전문대 영양학과 전임강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게 된 남편을 따라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강의 나가면서 두 아이 키우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탈출구가 필요했죠.” 80년 귀국행 비행기에 탔을 땐, 다시 강단에 선다는 꿈에 한껏 부풀었다.
하지만 3년 만에 처음 아들과 만난 권 사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훌쩍 자라 네 살이 된 아들이 권 사장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에게 ‘아줌마’라고 부르며 집(시댁)에 가겠다고 밤새 보챘다. “커리어는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지만, 아이는 영영 되찾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권 사장은 자신의 꿈을 접었다. 그는 “6년 동안 두 아이를 돌보며 가정을 지켰다”고 말했다. 하지만 집에서 나름대로 사회 복귀를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 점심과 저녁 사이에 4시간씩 ‘나만의 시간’을 갖고 자기계발에 매달렸다. “미국에서 쌓은 영어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타임 등 영자지를 매일 읽고 의약품 전문서적도 열심히 훑었죠.”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다국적 제약회사인 스티펠의 CEO 공개 채용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스티펠 본사 임원들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권 사장은 자신을 ‘전업주부’라고 소개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가르쳐 주면 뭐든 잘할 수 있다고 했어요. 외국인들 눈엔 그런 당당한 제 모습이 신선해 보였나 봐요.” 스티펠측은 권 사장의 배짱을 높이 샀다. 그렇게 시작한 그는 5평짜리 사무실에서 출발한 한국스티펠을, 연 매출 150억원의 알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물론 처음부터 일이 쉽게 풀렸던 건 아니다. 당시 제약업계 풍토는 술 대접 없이는 거래처를 넓히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성에겐 큰 핸디캡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逆)발상’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처럼 섬세하고 부드럽게 영업 활동을 한 게 오히려 효과적이었던 것 같아요.”
권 사장은 아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여성들에게, ‘늘 깨어 있으면서 노력하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꼭 당부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