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불합리함을 폭로하다
지난 5월 전남대 대나무숲에 하나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대학 내 건물에 부착한 대자보에는 모델 수업 중 몰카에 찍혔다는 누드모델의 글이 적혀 있었다.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비슷한 사건이 벌어져 네티즌들의 분노가 일파만파 커졌다.
신라 경문왕의 신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털어놓은 대나무숲. 1000년도 더 지난 요즘 대학생들 역시 ‘대나무숲(대숲)’에 속내를 털어놓는다.
이 숲은 진짜 숲이 아닌 온라인 숲이다. 지난 2012년 트위터 ‘출판사 옆 대나무숲’을 시작으로 서울대 등 현재 약 100여개 대학의 학생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익명 커뮤니티 ‘○○대 대나무숲’을 운영한다. 학생들이 페이스북 메시지 등으로 사연을 보내면 대숲 관리자가 이를 익명 처리해 게시한다.
처음엔 대학생활 잡담, 고민 상담 등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최근 성범죄와 미투 운동 등 사회 문제를 기반으로 그동안 참아왔던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예전 대숲이 해당 학교의 학생들을 구성원으로 이뤄졌다면 지금은 다르다.
타 대학생이나 외부인까지 팔로우하면서 대숲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지고 있다. ‘서울대 대나무 숲’은 팔로우 수만 40만을 넘어서면서 대학가와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올 상반기를 뜨겁게 달궜던 ‘미투 운동’에 대한 대숲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지난 3월 한국외대 대나무숲에 대학생 3명이 수 년간 L교수에게 당했던 성희롱과 성추행을 폭로했다.
“A 학과에서 L 교수는 왕이었다. 학과 구성원 대부분이 L교수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더 이상 L교수의 만행에 참을 수 없었던 그들은 최근 확산하고 있는 미투 운동을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서울예대 대나무숲에도 외침이 이어졌다. 지난 2월 올라온 게시물은 신입생 시절 자신이 당했던 OT(오리엔테이션)의 피해 사례를 담았다 .
A씨는 "남자 선배가 여자 선배를 방으로 끌고 가더니 때리는 소리와 함께 욕설?비명?신음소리가 들렸다"며 “이후 우리에게 손바닥을 들이밀며 자신의 XX를 핥아보라며 한 명씩 얼굴에 들이밀었다”고 전했다.
공포 분위기에 몸이 굳어버린 신입생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 중 울먹이며 핥은 학생도 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일단락되자 선배들은 '몰래카메라'였다며 웃고 떠들었다. 몰카는 선배들에게 OT 겸 신입생 환영회였다.
하지만 A씨에게는 끔찍하고 추잡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는 “선배라는 권력 안에 숨어 있을 성추행 성희롱에서 후배들이 더 안전하길 바란다"고 털어놨다.
'어둠의 대숲' 찾는 청년들…부작용 우려도
하루가 다르게 영향력을 확대하는 대숲을 두고 20대 청년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네티즌들은 ‘악용만 없으면 좋은 기능’, ‘공개된 정보가 많은 시대에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곳’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마녀 사냥하기 딱 좋은 도구’, ‘당사자가 아닌 경우에 겪는 고통은 누가 책임져 주냐‘ 등 부정적인 반응도 만만치 않다.
대숲의 영향력이 확대하면서 내용을 미리 살펴보고 거르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예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할 수 있는 '어둠의 대숲'으로 향하고 있다.
어둠의 대숲에는 필터링 기능이 없는 비공식 계정이 대부분이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사회 현안의 핵심을 꼬집는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문제해결 노력은 외면한 채 일방적 비난과 폭로로 오히려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함께 나온다.
어둠의 대숲은 그 반작용으로 ‘필터링 없음’을 내걸고 2년전부터 생겨났다. 최근에는 여성ㆍ남성혐오 논쟁이 주된 관심사다. 대학생 유모(23)씨는 “온라인에서도 터놓고 토론하는 공간이 적어 솔직한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는 어둠의 대숲이 인기를 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노골적인 성 묘사나 개인을 특정한 욕설ㆍ비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보 검증 절차가 거의 없어 애꿎은 사람을 피해자로 만들기도 한다.
익명성을 담보로 한 대숲이 확산하고 있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적절한 대화 창구가 단절된 상황에서 세대 간 격차와 경직된 사회 분위기 등이 낳은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타인과의 관계가 청년세대의 주요 고민이지만 양상이 달라졌다”며 "토론 문화가 실종되고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서 대숲은 개인의 처지를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됐다"고 말했다.
[문승관 기자, 박창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