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이데일리 김인경 특파원] 서울서 휴가를 마치고 베이징에 돌아오던 비행기 안이었다. 이륙을 알리는 방송에 중국 핸드폰과 한국 핸드폰의 전원을 끄는데 옆 자리의 중국인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던 그는 역시 한국 사람들은 삼성을 좋아하는 거 같다고 말했다. 난 그제야 삼성 로고가 박힌 내 핸드폰들을 봤다. 딱히 이유가 있어 사용하는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을 뿐이었다. 내가 그런 건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최근 출시된 샤오미 제품이 저렴하고 성능도 괜찮다고 말을 했다.
어느 나라든 소위 ‘국뽕’에 취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건 힘든 일이다. 뻔한 대화를 예상하며 모른 척 눈을 감으려는데 청년은 한 번 더 말을 걸어왔다. 그는 자신이 IT, 특히나 스마트폰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샤오미나 삼성뿐만 아니라 애플, 화웨이, 소프트뱅크 등 어느 나라 제품이든 한 번은 써보는 마니아라며 이미 중국에서 애플리케이션(앱)도 만들어 내놓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아직 대학생이지만 언젠가 레이쥔을 넘어서는 사람이 될 거라고도 자신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하는 말 치곤 참으로 당황스러운 소리라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청년이 말했던 레이쥔은 알려진 대로 샤오미의 최고경영자(CEO)이다.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 IT 업계를 주름잡고 있지만 아직 쉰살도 되지 않은 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87년 당시 중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던 우한대 컴퓨터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뒤 컴퓨터 상가에 매일 들락날락하면서도 2년 만에 모든 과목을 이수할 정도로 컴퓨터 덕후의 면모를 단단히 보여줬다고 한다. 대학교 4학년 시절 인터페이스 카드를 만드는 회사를 창업했지만 기술을 도용당하고 6개월 만에 회사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낙담하지 않고 1992년 중국 IT업체 킹소프트에 입사했고 1998년 대표이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2007년 킹소프트의 상장을 완료한 후 자신의 꿈을 실현할 회사를 만들기 위해 사표를 내던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샤오미다.
창업 정신, 기업가 정신이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적인 판단과 낭만적인 도전을 이어가는 걸 말한다. 레이쥔 뿐만 아니라 이달 11일 ‘광군제’를 세계 최대 쇼핑 행사로 만든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 역시 이 같은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CEO의 등장은 중국 청년들에게 힘이 되고 있다. 공산당 간부의 자식이 아니어도 아이디어가 있고 실력이 있다면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 역시 어느 과정에선 당과 결탁해야 하는 만큼, 창업과 성공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자수성가 인물이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와는 전혀 딴판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20대는 취업 문턱까지 갔다가 좌절하고 다시 원서를 쓰고 또 좌절했던 기억뿐이다. 나중엔 내가 어떤 이유에서 이 일을 하고 싶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잊고 빨리 직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만 하게 됐었다. 만일 그때 존경하는 사람,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내 꿈을 이룬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덜 힘들지 않았을까. 레이쥔을 뛰어넘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대뜸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용기가 생기지 않았을까.
거실엔 중국에 오자마자 샀던 샤오미 공기청정기가 하루 종일 돌아가고 있다. 눈이 아파서 새로 장만한 컴퓨터 모니터 역시 샤오미의 것이다. 샤오미의 로고를 보다 그날의 청년을 생각해 본다. 그 때 말하진 못했지만 언젠가 꼭 자신이 말했던 대로, 레이쥔을 넘어서는 훌륭한 CEO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나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