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정민 부장]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는 최순실 청문회인지, 이재용 청문회인지 헷갈린다. 이튿날 열린 청문회는 김기춘 청문회였다. 이틀 동안 전국민의 관심을 모은 최순실 청문회에 막상 최순실씨는 물론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우병우 전 정무수석 등 최순실 게이트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핵심 증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반쪽짜리 정도가 아니라 알맹이 빠진 개살구 청문회다.
청문회에 큰 기대는 없었다. 검사들이 밤샘 조사를 벌이고도 밝히지 못한 의혹들을 국회 청문회에서 의원들이 규명한다면 검찰은 무능했거나, 진실에 눈감았거나 둘 중 하나다. 100명이 넘는 수사인력을 동원한 역대 최대규모의 특별수사본부까지 꾸렸던 검찰로서는 밥숟가락을 놓아야 할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의원들 입장에서는 이번 청문회는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 총수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만으로도 성공한 청문회다. 청문회에 불려나온 총수들이 이끄는 9개 그룹 총 매출액은 2015년 기준 910조원이다. 정부예산(375조원)의 2.5배, 국내 총생산(GDP) 1559조원의 절반이 넘는다. 대한민국 국민 절반이 9개 그룹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의원들은 총수들을 다그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을 탈퇴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재계 1~4위인 삼성, 현대차, SK, LG가 전경련을 떠나면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전경련 해체는 자업자득이다.
이번 미르·K스포츠재단 사건에서 전경련은 재계의 대(對)정부 창구가 아닌 청와대의 대((對) 기업 창구 역할을 했다. 총수들이 줄이어 탈퇴를 선언한 것은 단순히 의원들이 압박 때문만은 아니다. 전경련이 제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해서다.
대통령의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는 검찰이 최순실 안종범 정호성을 기소한 날 내놓은 입장자료에서 대통령이 기업인들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은 어느 정권때나 있었던 일이라고 항변했다. 사실이다.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세운 일해재단은 대기업들로부터 598억 5000만원을 모금했다. 30년도 더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막대한 금액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미소금융재단을 세우면서 기업들부터 2659억원을 모았다. 대중소기업협력재단에는 삼성전자가 1055억원을 내놓는 등 87개 기업이 7184억원을 출연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 때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기금으로 삼성, 현대차 등 5대 그룹이 215억원을 내놨다. 이 때마다 앞장 선 곳이 전경련이다.역대 대통령들이 기업을 ATM기 취급한 이유는 기업들이 군말 없이 현금인출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대가를 기대했을 수도, 정권에 밉보일까 걱정되서일 수도, 좋은 일에 쓴다니 흔쾌히 내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부탁한다고 회삿돈을 수십억~수백억원씩 내놓는 건 정상적인 기업이 아니다.
정유섭 새누리당 의원의 지적은 뼈아프다. 정 의원은 “총수 있는 기업은 아무 말 없이 돈을 냈다. 총수 없는 기업은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왜 이런 걸 하느냐 반대의견을 내 제동을 걸었다”고 했다. 정 의원은 재벌기업의 황제경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꼬집었다.
청문회에 불려온 총수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환골탈태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라를 위해서도 기업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야할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