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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현대미술은 드로잉을 밑그림이나 아이디어 정도로 축소해서 해석한다. 그러나 특별한 재료 없이도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 드로잉이다. 우리의 고구려벽화에서 보듯 선만으로도 장대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르코미술관에서 올해 대표작가전으로 열리는 ‘확장하는 선, 서용선 드로잉’ 전은 강렬한 색채와 거침없는 선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낸 서양화가 서용선(65)의 드로잉 작품을 집대성한 전시다. 서 작가가 1980년대부터 그린 드로잉 아카이브 1만여 점 중 ‘도시와 군상’ ‘역사와 신화’ ‘자화상’ 연작 등에서 엄선한 700여점의 드로잉작품을 선보인다.
◇1만여점 중 엄선한 700여점
서 작가는 60여회의 개인전을 비롯해 200여회의 기획전·단체전에 참여할 만큼 정열적인 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노산군일지’와 ‘매월당 김시습’ 연작을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을 표현해 왔다. 2008년에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 정년을 10여년이나 앞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겠다며 사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상’과 2014년 제26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는 등 대한민국 대표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서 작가의 드로잉은 초기 작업을 모아 펴낸 두 권의 책과 1995년 미국 뉴욕서 전시한 ‘자화상 드로잉’ 전에 일부 선보인 적은 있지만 수백점을 한꺼번에 관람객 앞에 꺼내놓기는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낯선 곳에서 자화상 그리는 게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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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론가의 평가처럼 서 작가의 드로잉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결성을 지니며 독자적인 작품으로 다가온다. 전시작 중 ‘자화상’ 연작은 청년기부터 서울대 교수직을 스스로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된 장년기까지 모습을 오롯이 담았다.
서 작가는 “1995년 미국의 한적한 시골인 버몬트주에서 레지던시를 할 때 전지 사이즈의 자화상을 처음 그렸다”며 “이후 해외에 있을 때 혹은 아직 무엇을 그려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을 때 주로 자화상을 그렸다”고 말했다. ‘자화상’을 그리는 데 가장 적합했던 것은 도구나 재료에 대한 제한이 덜한 드로잉이다. 서 작가는 “외국에 나갔을 때 짐을 풀자마자 드로잉으로 자화상을 그리는 게 습관이 됐다”고 덧붙였다.
◇목판에 새긴 9m 대형 드로잉 ‘도시에서’ 눈길
라면이나 과자 봉지, 전단 등에도 드로잉 작업을 해온 서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목판에 새긴 가로 9m와 세로 2.2m에 이르는 대형 드로잉 ‘도시에서’를 선보인다. ‘도시와 군상’ 세션에 중심작품으로 자리잡은 ‘도시에서’는 뉴질랜드산 목판 위에 서울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포착해 새겼다. 빌딩 숲에 갇혀 ‘각자도생’하고 있는 개인, 촛불을 들고 시대의 불의에 조용히 항거하는 소녀의 모습을 특유의 힘있는 선으로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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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신화’ 섹션에서는 중국의 거인 반고를 비롯해 복희와 여와 남매, 서왕모 등 중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마고할매 등 한국설화에도 나오는 인물의 드로잉을 볼 수 있다. 힘차고 단순한 선에서 나오는 기운이 서용선이 추구하는 회화작품의 기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 작가는 “‘드로잉’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생각의 방향과 잠재적으로 진행 중인 내용의 해석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고 미완성 자체가 본래적인 성질의 그림”이라며 “최근에는 스마트폰이나 목판 광고전단지, 목판화 등 드로잉을 할 수 있는 소재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를 준비한 이영주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형태로서 드로잉이 갖는 미학적 가치에 주목했다”며 “서용선의 모든 작품은 드로잉이란 단단한 토대 위에서 탄생한 것이란 걸 보여주기 위해 전시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10월 2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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