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주유소를 운영하는 김미여(34·경기도 이천시)씨 가족은 4~5년 전까지만 해도 매달 소득 300만원 중 80만원을 저축했다. 하지만 지금은 소득이 250만원으로 줄어든 데다 지출은 오히려 늘어 저축을 전혀 못한다.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인 두 자녀의 교육비에만 90만원, 의료보험과 국민연금 등에 30만원이 들어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고소득층인 A증권사 김모(38) 과장 부부도 사정은 비슷하다. 조그만 사업을 하는 부인과 합산한 가계소득이 월 935만원에 이르러 5년 전보다 35%나 늘어났지만, 저축은 오히려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외식이나 쇼핑은 확 줄였지만, 지난해 아파트를 마련하면서 받은 은행 대출 이자(94만원)에 아이 사교육비(137만원)를 내고 나면 저축은 65만원밖에 못한다.
빨간 돼지저금통의 추억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며 한국 경제의 고성장을 이끈 일등 공신이었던 저축률이 2000년대 들어 가파른 속도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이다. 소득은 정체 상태인데, 집 사느라 빌린 은행 대출 이자와 치솟는 사교육비, 그리고 세금·연금 부담 등 지출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축이 급감한다는 것은 미래의 잠재적인 투자 및 소비 재원이 줄어들어 미래의 충격에 취약해졌음을 의미한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급락하는 저축률
한국의 가계 저축률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3.2%로 정점을 기록했으나 이후 급격히 떨어져 작년엔 2%대에 그친 것으로 정부는 추정하고 있다. 이는 2002년 신용카드 대란(大亂) 당시 2%로 떨어진 후 최저 수준이다. 가구당 저축액도 1999년 연간 400만원이던 것이 작년엔 6분의 1도 안 되는 63만원(추정)으로 떨어졌다. 하락 속도도 가파르다. 1999~2006년 사이에 미국·일본·영국 등 OECD 14개 국가의 저축률은 평균 6.6%에서 5.3%로 1.3%포인트 하락에 그친 반면, 한국은 그 열 배인 13%포인트 이상 하락했다.
우리 저축률이 미국(-0.5%), 일본(2.4%)보다 높다고 안심할 처지는 못 된다. 선진국은 1인당 GDP(국내총생산) 2만 달러 달성 당시 저축률이 10% 안팎(일본 13.5%, 영국 9.4%, 독일 13.9% 등)이었으나, 한국은 그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박사는 “선진국 문턱도 가기 전에 저축률만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셈”이라며 “경제가 악화되면 위험에 완충(buffer) 역할을 할 수 있는 금융 자산이 없어 파산자가 급증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주머니에 쌈짓돈이 없기 때문에 위기가 닥치면 버틸 여력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저축 양극화 심화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가계는 돈을 아껴 저축하던 구조에서 빚 내서 쓴 뒤 벌어서 메워 넣는 구조로 바뀌었다.
빚을 내 집을 장만하는 서민들이 늘면서 가구당 가계 부채는 1999년 1465만원에서 작년 3518만원으로 연평균 20%의 증가율을 보였다. 여기에 세금과 연금 등 비소비지출 부담도 소득 대비 11.5%에서 14.8%로 늘었다.
반면 소득 증가는 더디니 저축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전 7년 동안 가처분소득(소득에서 세금 등 비소비지출을 뺀 것) 증가율은 연간 14.7%에 달했지만, 1999~2005년 사이엔 소득증가율이 예전의 4.7%로 떨어졌다.
저소득층의 경우 저축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위 20% 소득 계층의 흑자율(처분가능 소득 중 소비지출을 뺀 금액의 비중으로 저축률을 엿볼 수 있는 수치)은 1997년 1.9%에서 2005년 -13.5%로 급락했다.
저축률 하락은 향후 소비 회복에도 악영향을 준다. 정부 관계자는 “저축을 끌어다가 소비를 하는 소비 회복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또 미래의 투자 재원인 저축률이 하락할 경우 투자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는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