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심리학을 쉽게 정리해놓은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내 삶의 가치관들이 일정 부분 투영되어 있고, 내가 ‘발가벗은 힘’을 키우는 과정에서 나만의 개똥철학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철학자와 젊은 청년이다. 책에서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들러의 목적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라고 말해주는 거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 목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심각해질 필요 없어.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한 것을 착각하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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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말은 사실 100% 공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는 것이다. 과거의 일을 너무 자책하거나 후회하지 말고, 교훈으로 삼아 현재와 미래 지향의 삶을 살자는 말이다. 그래서 나 같은 코치들은 코칭을 할 때 “(지금까지는 그렇게 사셨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라고 질문한다. 이를 ‘미래 질문’이라고 한다. ‘미래 질문’은 삶의 에너지를 높여준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과거에 얽매어 넋두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들은 현재와 미래보다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과거를 후회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하지만 과거는 영원히 갔고, 미래는 늘 미래로 남겨져 있기에 우리에겐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이라고 하지 않던가! 굳이 니체의 ‘영원회귀(永遠回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과거를 ‘독립사건(서로 독립되어 다른 사건이 일어날 확률에 영향을 주지 않는 각각의 사건)’으로 보는 습관을 가진다면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셈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으니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오로지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니체 역시 현실의 삶의 고뇌와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만을 충실하게 사는 데에 생의 자유와 구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한 것을 착각하지 말게”이다. 나이가 들수록 심각한 사람들과 점점 거리를 두게 된다. 진지한 사람들은 깊이가 있다. 하지만 심각한 사람들은 함께 있으면 피곤하다. 내가 미국에서 MBA를 밟을 때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스승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넓고 우수한 인재는 정말 많았다. 중요한 것은 역량과 인성, 둘 다 뛰어난 사람이 어딜 가든 환영 받는다는 점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인성도 훌륭한 친구들은 어딜 가든 환영 받았다. 그들은 실력이 뛰어나지만 겸손하고,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고 유머러스하며, 공부할 땐 공부하고 놀 땐 확실하게 놀고, 개인플레이와 팀플레이에 모두 강했다. 나보다 어리지만 여러모로 성숙한,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나이가 들수록 심각하고 무거운 사람보다는 유쾌하고 가벼운 사람들이 좋다. 가벼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즐겁다. ‘가볍다’는 것은 좋은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도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목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목표 따위는 없이 살아도 된다는 말일까?
《미움받을 용기》에서 철학자는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인생’은 ‘키네시스(kinesis)적 인생’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실현해가는 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인생’은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인생’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운동을 지칭하는 키네시스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 시작에서 끝에 이르기까지의 운동은 가능한 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급행열차를 탈 수 있다면 일부러 역마다 정차하는 일반 열차를 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여정은 불완전하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네르게이아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말한다.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인 것이다.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등산을 할 때, 그 목적이 정상에 오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키네시스적 행위라 할 수 있다. 키네시스적 관점에서는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그 등산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등산의 목적이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등산 그 자체인 에네르게이아적 운동에 있다면 정상에 오르고 안 오르고는 상관없다.
에네르게이아적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언제나 완결 상태에 있다. 내가 야생에 나와서 하는 일(글 쓰고, 강의하고, 코칭하는)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역시 에네르게이아적 관점 때문이다. 키네시스적 관점에서 일을 하면 삶이 피곤하다. 키네시스적 삶을 살면, 100세 시대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진정으로 즐기면서 건강하게 롱런하기 어렵다고 본다.
철학자의 말처럼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그것은 앞으로의 우리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실 영향을 줄 순 있겠지만, 그냥 ‘독립사건’으로 생각하자. 과거의 일을 너무 자책하거나 후회하지 말자.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이고, 그 자체로 삶은 완성된다.
◇이재형 비즈니스임팩트 대표
전략·조직변화와 혁신·리더십 분야의 비즈니스 코치(CPCC·PCC·KPC). 주로 기업의 CEO·임원·중간관리자를 대상으로 강의와 코칭을 하고 있다. KT 전략기획실 등을 거쳐 KT그룹사 CFO 겸 경영기획총괄로 일했다. 미시간대 경영대학원에서 MBA학위를 취득했으며, 저서로는 《발가벗은 힘》, 《테크노 사피엔스》, 《스마트하게 경영하고 두려움 없이 실행하라》, 《전략을 혁신하라》, 《식당부자들의 성공전략》, 《인생은 전략이다》가 있고,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