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제공] 정말이지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창문 너머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내가 코흘리개 시절에 듣던 바로 그 뻐꾸기 소리였기 때문이다.
"뻐-꾹 뻑뻐꾹."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그 소리, 숲을 일으켜 세우고 서걱이던 낙엽을 잠재웠던 그 소리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회의 한 변두리에서 생생한 꿈처럼 살아나고 있었다. 개발의 바람을 타고 멀리 떠난 줄 알았던 뻐꾸기 소리를 몇 해 지난 지금 듣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감회가 새로웠다.
도대체 뻐꾸기는 어디에 앉아 저렇게 청승맞은 소리를 내고 있는 걸까. 창문을 열고 바라보아도 뻐꾸기가 울 만한 둥지는 없었다. 창문너머 바로 다닥다닥 붙은 주택들이 보이고 더 멀리로는 큰 대로변에 듬성듬성 서있는 플라타너스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소음과 공해에 젖은 허공뿐, 더구나 어둠이 깔린 거리를 비춰 주는 가로등과 상점의 불빛은 뻐꾸기가 앉아 울만한 시골의 서정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 옛날의 풍경은 눈물이 날만큼 싱그러웠다. 머리를 푼 나무들이 산마루나 계곡에 터를 잡아 숲을 이루고 꽃잎이 뜨거운 진달래가 화끈화끈 온 산에 불을 지필 때 뻐꾸기 소리는 타다 남은 불씨처럼 살아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울음이 얼마나 아련했던지 한때는 그 소리에 취해 뻐꾸기의 정체를 찾아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뻐꾸기는 꼭꼭 숨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민가와 가까운 숲에서 울어 주고 사람들의 마음에 감성적 서정을 심어 주던 다른 새들과는 달리 뻐꾸기라는 존재는 그냥 내 마음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신비한 새로 통했다.
그런 새가 지금 도시의 한 변두리에서 울고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뻐꾸기가 우는 날은 한밤중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나는 이번에는 뻐꾸기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감기는 눈을 주먹으로 비비며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대로변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뻐꾸기는 나의 애타는 심정도 모른 채 내가 도로변에 도착하기 전 그만 울음을 싹 거두어 버렸다. 나는 무엇인가 홀린 사람처럼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인터넷 검색창을 뒤져 뻐꾸기의 정체를 찾기 시작했다. 인터넷에는 뻐꾸기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실려있었다.
몸길이 약 35㎝. 몸 윗면과 가슴은 잿빛이고, 배는 흰 바탕에 검은 가로줄무늬가 있다. 꼬리는 길며, 날개는 가늘고 길다. 날 때는 매 종류와 비슷하다. 뻐꾸기라는 이름은 <뻐꾹 뻐꾹>이라 들리는 울음 소리에서 유래한다. 한국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5월 하순부터 8월 상순이며, 이 시기에 같은 종류인 두견이나 벙어리뻐꾸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둥지를 만들지 않고, 개개비, 까치, 할미새 둥지에 알을 낳는다. 이른바 탁란이다.
탁란, 나는 탁란이란 말에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 시켰다. 탁란은 자신이 둥지를 만들지 않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부화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나는 평소 뻐꾸기가 갖고 있는 이 탁란의 습성 때문에 그 새를 인정머리 없고 몹쓸 새로 알고 지낸 적이 있었다. 세상 어디 할 짓이 없어 남의 둥지에 알을 놓고 쪼르르 도망을 친단 말인가.
고개 들어 숲을 쳐다보면 온통 제 둥지를 만들 장소다. 두터운 가지를 사방으로 뻗어 올린 참나무 위에도 만들 수 있고 하늘을 쿡쿡 찌르며 올곧게 서있는 미루나무 가지에도 제 둥지를 틀 수 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들, 하늘을 덮은 숲들, 모두가 뻐꾸기를 가슴에 품을 친구들인 것이다. 뻐꾸기가 부지런하다면 밤과 낮을 번갈아 가며 둥지를 짓고 진달래가 화끈거리며 온 산을 뒤덮는 늦봄까지 뭇 새들과 어울려 한 시절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을 뭉갤 듯 아련한 울음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은 자신의 그런 습성을 숨기려고 하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으니 그 얼마나 못된 짓이냐 말이다. 그래도 그런 결점은 있었지만 나는 뻐꾸기 울음소리만큼은 내 마음 속에 넣어 두고 살아왔다. 더운 여름날 미루나무 도열해 있는 신작로를 걸으면서 뻐꾸기 울음소리에 취해 아련하게 향수를 느낀 적이 있을 정도로 뻐꾸기를 신비스런 새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몇 해를 견뎌왔다. 수십 번의 계절이 바뀌고 코흘리개 적의 내가 오십 줄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때 창문 너머에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는 내 가슴 속을 뜨거운 피로 요동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며칠 전처럼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대로변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어쩐 일인지 뻐꾸기는 아련한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통 소리나는 쪽을 알 수 없었다. 드문드문 늘어서 있는 플라타너스 위를 쳐다봤지만 머리가 휑하니 깎인 나뭇가지엔 희끄무레한 어둠만 내려앉아 있었다.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도 도저히 뻐꾸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차량행렬에 묻혀 멀리 사라지는 차의 뒷 꽁무니를 발견하곤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뻐꾸기 소리는 바로 그 차가 내는 경적 소리였다. 밖에 놀러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온 아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빠, 나이트 클럽 광고용 차가 내는 뻐꾸기 소리 들어 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