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석자 : 박경준 블루라이노 대표(故 박환성 PD 동생), 오영미 씨(故 김광일 PD 배우자), 송규학 한국독립PD협회 회장, 복진오 한국독립PD협회 전 권익위원장, 권용찬 한국독립PD협회 대외협력위원장
△제작·인터뷰 : 김유성 이데일리 기자
다들 아실 것 같습니다. 지난 7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야생전문 독립PD였던 박환성 PD가 아프리카TV 현지에서 촬영중 순직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PD들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박환성 PD와) 저와는 6월말에 만났습니다. 그때 기사를 쓰고, 7월말 귀국을 하면 또 만나자고 했습니다. 후속 기사를 쓰기로 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고, 그의 후속 기사는 그의 사망 소식이 됐습니다.
5개월 뒤 우리 사회는 많이 바뀌었을까요? 박 PD가 바꾸고자 염원했던 방송사 갑을 형태는 바뀌었을까요? 언론사 최초가 될 수 있는데, 5개월만에 유족분들이 나오셨습니다.
자리에는 고 박환성 PD의 동생분, 고 김광일 PD의 아내분이 와 계십니다. 독립PD협회 송학규 회장, 복진오 PD, 권용찬 PD가 와 계십니다.
-유족분들, 안녕히계시냐고 물어보기가 민망합니다만,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박경준 씨(고 박환성 PD 동생)
“사고로부터 5개월 남짓 지났는데, 아직 바뀐 것은 많지가 않습니다. EBS와 유족 간 협상은 진행중이고 마무리 단계입니다. 하지만 EBS와 블루라이노(박 PD의 스튜디오 법인) 법인과의 (분쟁 관계는) 진척된 단계가 없습니다. 풀어나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유족간의 보상과 관련된 문제가 해결이 되고 그 다음에는 불루라이노와 EBS 간 문제일 것 같습니다.”
△오영미 씨(고 김광일 PD)
“아이들도 있고 잘 버티고 있습니다. 애들하고 힘내서 살자 살자 버티고 있지만 버틴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은 드라마에서 나올 법 했는데, 너무 공허함도 많이 들고. 이게 진짜 사실인제 가짜인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잘 지내고 있다고 못하는 것 같아요. 저 혼자서 어떻게든 버티려고 하고. 많이 버티려고 하고 많이 버티려고 하고 있지만.”
-제작이 중단된 다큐멘터리 ‘야수의 방주’는 어떻게 되나요?
△박경준 씨(고 박환성 PD 동생)
“박환성 감독의 유지를 받는 측면에서는 EBS와는 더 이상 하지 작업하지 않으려는 유가족의 생각이 고려가 돼야 합니다. 야수의 방주는 전파진흥협회 EBS 양측에서 제작 지원금을 받기로 하고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전파진흥협회에서도 제작 중단하는 것으로 됐습니다. 나머지 지원금도 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작품 완성을 위해서는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이 돼야 합니다. 어디에 어떻게 방송을 할 것인지. (지금 당장) 그런 부분은 당장 해결해야하는 부분은 아닙니다. 방송 작품이 어떻게 하면 우리 형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품성 있게 갈 수 있을지 시간을 갖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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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와 유족 간 합의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다만 그 부분은 법원에 의한 민사 조정 절차에 있습니다. EBS가 공사다보니 관련 규정이 없습니다. 법원의 중재 하에 양쪽이 어느 정도 수용을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법원의 조정안도 어느 정도 나왔습니다. 최종 수용을 남겨둔 과정에 있습니다. 100% 결정 난 것은 아닙니다. EBS 사장 등 윗선에서는 유족을 배려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EBS 전체적으로는 소극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부분에서는 아직 미진하다고 봅니다.”
-자제 분은 몇 명인가요?
△오영미 씨
“두 명입니다. 10살 딸, 8살 아들이 있습니다. 올해가 결혼 10년이 된 해이기도 합니다. 한 번은 남편이 꿈속에 나타났습니다. 자기 잘 살아 있다면서 갑자기 나타났어요. 저는 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갈 것 같은데 꿈 속에서라도 먹고 싶은 것, 이런 것 다 해주고 싶은데.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꿈속에서) 찍었어요. 사실 영상이나 사진 남아 있는 게 없었어요. 얼마나 가슴 속에 한이 됐을까. 그 사람이 한 마디 했어요. ‘다들 나 없는데 잘 지내고 있지?’라고. ‘당신 없는데 누가 잘지내겠느냐’고 발끈했어요. 그 사람 표정이 낙담했다고 해야하나. 평소에 밝은 얼굴이었는데. 함박 웃음이었는데. 눈웃음이 멋있었는데. 그 표정이 아니었어요.”
-방송 업계 을로 힘들었을 것 같아요.
△오영미 씨
“저보다도 그 사람이 수모를 더 많이 겪었어요. 전 독립PD가 아니지만 이것저것 간접적으로 접해서, 부당한 것을 많이 알고 있었어요. 한번은 시사를 6번이나 한 적도 있었고요. 외주방송 PD들이 아이템 짜기 쉽지 않은데. 결론은 이 사람 만든대로 원상복구 됐고요. 본사에서는 방송을 아는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달라진 점이 많으시죠?
△오영미 씨
“달라진 점이 딸이에요. 이제 10살인데. 얘는 다 알아요. 아빠랑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는데. 제가 생각을 했어요. 사진을 보면서. 왜 우리는 가족사진이 없을까. 딱 2장 있었고요. ‘찍자찍자’했던 게 ‘방송일 때문에, 시사 때문에, 편집 때문에’ 등등으로 미뤘어요. 결론적으로 찍을 시간이 없었죠. 제대로 나온 가족 사진이 없어서 만화 캐리커처 그리는 분한테 따로따로 그림으로 그려 가족사진을 만들기도 했어요. 저는 허탈한 심정이죠. 어느 날 밤늦게 눈물이 떨어지는데 주체할 수 없는 거예요. 쏟아지는 눈물을 꼭 참아내면서 집에 갔는데, 막상 전화할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내 평생의 동반자였는데, 이 사람이 가고 나서 누가 내 얘기를 들을까.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큰 애가 어느 날 물어보더라고요. ‘엄마 산타가 진짜 있을까, 진짜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잠시 후 또 물어보는 거예요. ‘진짜 산타가 있어?’ 10살이니까 산타가 없다는 것은 알잖아요. 그런데 ‘산타할아버지가 선물로 아빠를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한 숨이 푹 꺼지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어요. 전 ‘아빠가 그날 못 오시더라도 꿈속에서라도 나타날 거야’라고 했어요. 예전에는 마음 속에 꾹꾹 담고 있었는데 요새는 심리 치료를 받고 있어요. 애들이 충격이 있다 보니까. 조금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얘네들도 아빠를 가둬두는 게 아니고 오픈해서 이야기하고. 시간이 지나면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만. 애들도 힘들고.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어요.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런 저런 상황들을 생각하며 강하게 살아야겠다. 버티고 있어요.”
-형이 하던 제작사를 이어 받으셨어요.
△박경준 씨
“대표이사 승계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박환성 감독이 진행하던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 EBS로 인해 실추된 명예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EBS 주장에 따르면 박환성 감독의 블루라이노가 계약을 위반한 것으로 돼 있어요. 박 감독도 정확한 근거를 요구했지만 그 이후로도 EBS가 입장을 표명한 게 없습니다. 여전히 블루라이노 픽처스가 계약을 위반했다는 주장을 거둬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합의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박경준 씨
“그게 앞 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방불특위에서도 그런 것에 대한 진상조사와 정확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EBS 측과 회담을 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박환성PD와 김광일 PD 사고 소식 후 아프리카 현지에 수습하러 갔을 당시 간략한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복진오 PD (독립PD협회 전 권익위원장. 현 협회 방불특위 부위원장)
“상황 소식을 들었을 때 감정적으로 많이 슬펐습니다. EBS와의 관계 때문에 억울했던 측면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고인들을 어떻게 모셔와야할지 상당히 막막했습니다. 가족들한테 어떻게 연락을 해야할지도. 비용적인 문제도 그렇고. 기적처럼 뜻하지 않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줘서 기적처럼 두 분을 모셔왔습니다. 우리들도 힘들었는데, 가족들이 사고 현장을 보고 고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는 게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사관 직원들도 나름 역할을 잘했습니다. 사안이 사안인만큼 남아공 현지 경찰과도 적극 협조했습니다. 현지 가이드, 시신 안치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다만 국가적 시스템이 돼 있고, 사고 직후에 대처를 명확히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도와줘 가족의 품으로 모셔올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사고 수습단에서는 사고 원인을 어떻게 보셨나요?
△복진오 PD
“업무에 대한 과도한 압박과 스트레스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박환성 PD와 같이 2014년도 인도에 촬영을 갔었는데, 그때도 적은 예산으로 해외 촬영을 해야 했습니다. 자가 운전을 해야했고. 밤에 이동해야했고. 과도한 업무에 적은 제작비로 압박이 심했습니다. 같이 경험해본 저로서는 이 문제를 안고 남아공을 간다는 게 걱정됐습니다. 촬영 현장도 힘든데, 이 복잡한 법률적인 문제를 갖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가더라도 절대 이런 생각하지말고 편하게 촬영에만 집중해라. 돌아오면 해결할 수 있는 게 생길 것이다.”
△권용찬 PD (독립PD협회 대외협력위원장)
“이러한 비극이 잊혀지지 않고 거듭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다면, 그리고 이런 게 쌓이면서 변화를 준다면 미디어 생태계 환경도 변화할 것이라고 봅니다. 저작권도 방송사가 소유·전유 하는 환경 문화가 쉽게 바뀌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방송사가 생각하는 속도보다 플랫폼이나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저작권의 무게중심 이동도 기존의 변화 흐름보다 훨씬 더 빨리 이뤄질 것이라고 봅니다.”
-사고 소식 들었을 때 당시 심경은 어땠나요?
△박경준 씨
“외교부 직원으로부터 들었을 때부터 남아공 방문까지 정말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부모님한테 사실을 알리는 과정에서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부터 모든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걸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나, 정말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많이 나아지거나 치유됐거나 하는 부분은 많지가 않습니다. 5개월이라는 시간이 관점에 따라서 길 수도, 짧을 수도 있겠지만, 사고로 가족을 떠나보내는 입장에서는 유가족은 정신적 충격이 큽니다. 자연사나, 질병사보다도. 전혀 준비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꽤 장기간 지속될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당장은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승화시키고 싶습니다. 형과 관련된 유품 물품을 처분하거나 잊는 게 아니라, 그걸 옆에 두고. 지금은 슬프지만 ‘우리 형이 그랬지, 대단했지’ 좋은 기억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중입니다.”
-남편 김광일 PD는 어떤 분이셨나요?
△오영미 씨
“열정적이고 자기 일을 끝까지 해내는 PD였어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박환성 PD와도 비슷했죠. 고집불통이었다는 게. 방송계에서는 인재를 잃은 것이죠. 제 나름대로는 영웅이었어요. 제 삶에 있어 변화가 시작된 게 이 사람을 만나고부터였어요.”
“남편은 독립PD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도 PD를 하고자 했던 것은 어릴 때 힘든 과정도 있었고, 방송으로 보여주면서 뭔가 개선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시작했어요. 하지만 방송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른 데로 옮겨야 하고, 그것(작품)은 내것이 아니고.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많이 충돌했고. 지치기도 했죠. 야수의 방주를 마지막으로 (한숨) 접으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해보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다른 친구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어요. 푸드트럭 같은 일. 새롭게 이사도 하고 다른 것 다 포기하고 우리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자. 그러면서 결론은 ‘마지막’이라고 했죠. 그런데 마지막이란 말이 진짜 ‘마지막’이 됐어요. 사실 남아공으로 떠날 때, 현관 나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겁다고 했어요. 가기가 싫다라는 말을 자꾸 했어요. 그게 죽음으로 가는 저승길이었는지 직감했던 것 같고요. 촉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이미 자기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집은 시계도 10분 빨라요. 방송일이라는 게 10초도 아깝죠. 10분 일찍 나가려다보니까. 지금도 저희집 시계는 10분 더 빨라요. 그냥 많이 힘들어던 것 같아요.
-돌아가신 분들에게 못 다한 말이 있다면요?
△오영미 씨
“옆에 있을 때, 아프다고 할 때 발도 주물러주고 했어요. PD들은 허리가 많이 아파요. 허리도 주물러주고. 시간이 없으니 면도에 손톱도 깎아주고 다 해줬죠. 그래도 못해준 게 많은데. 그 사람은 그게 너무 좋았나봐요. 회사 가서 자랑하고, 천사라고 하고. ‘우리 애들 멋있지, 잘 생긴거야’ 그런 자랑도 많이 했죠. 하늘에서도 자랑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걱정은 잠시라도 붙들어 매고 잘 지내길 바라고 있어요.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이 분(남편) 돌아가시고 하늘이 안보였어요. 이러다 공중분해 되는 게 아닐까. 어떻게 해서든지 악착같이 버텨서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를 다시 만날 때까지 버티면서 기다리지 않을까요. 문자로 보냈던 거 ‘사랑한다’고 했어요. 너무 보고 싶었고. 결혼 10년 되는 날 리마인드 웨딩을 하기로 했는데, 올해가 10년되는 해였어요. 가족사진 찍자고 했는데 찍지도 못했고. 다시 보면 화를 낼 것 같아요. 원망하면서 화내면서 안도하지 않을까요. 사랑한다고 잘 지내라고 하고 싶어요”
△박경준 씨
“형의 일을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법인 대표까지 승계받은 이 위치에서 정말로 형이 바라던 바를 잘 이행하고 있을까 의문을 제 스스로 갖고 있어요. 그런 부분에서 뭔가를 할 때마다 조심스럽고. 그런 부분에서 정말로 잘 할 수 있도록 지켜봐 줬으면 합니다. 그걸 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