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지난달 28일 1년 동안의 창녕 교동 63호분 무덤에 대한 성과를 발표했다. 무덤은 지난해 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으로 눈길을 끌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에는 250여기의 고분이 몰려있다. 하지만 비화가야 무덤은 뚜껑 돌만 드러내면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구조여서 도굴에 취약해 일제강점기 당시 모두 도굴됐다. 63호분은 다행히 나중에 축조된 39호분 봉토에 가려져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무덤에서는 높이 21.5㎝의 금동관을 비롯해 관 금동 드리개와 금동 막대 장식, 굵은 고리 귀걸이 1쌍, 유리 구슬 목걸이, 은반지 4점, 은허리띠 등 장신구 일체가 나왔다. 금동 신발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지난 9월 화제가 됐던 경주 황남동 신라 귀족 무덤과 구성이 판박이다.
특히 금동관은 전형적인 5세기 후반 신라 양식을 갖고 있다. 금동관은 맨 아래에 너비 약 3㎝의 관테가 있고, 그 위에 3단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 3개를 세운 형태. 관테 아래 굽은옥과 금동구슬로 이뤄진 금동 드리개를 늘어뜨렸다. 이와 유사한 유물로 국보 제191호 황남대총 북분 금관이 있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은 삼국시대 장식을 하고 있다. 신라 금관을 대표하는 황남대총 북분 금관은 27.5cm 높이에 ‘山’ 모양의 3단 구조를 했고, 굽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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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의견은 가야냐 신라냐를 두고 팽팽하다. 가야를 주장하는 측은 무덤 양식이 가야의 것인 만큼 유물은 신라가 가야에 위세품을 전달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4세기 말부터 신라의 독특한 고분 형식은 ‘적석목곽묘’가 주류를 이룬다. 적석목곽묘는 지하 또는 지상에 목곽을 설치하고 목곽 사방에 사람 머리 크기의 돌을 높게 쌓아올리는 방식이다. 경주에 있는 높은 고분들이 대부분 적석목곽묘 형식이다.
이미 5세기 후반 창녕 지역이 신라에 확실히 편입됐다고 주장하는 측은 신라가 지방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동관 등 고위층 장신구 등을 하사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무덤 양식을 두고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당시 중앙과 지방의 관계는 굉장히 유연하고 자율적이었을 것”이라며 “신라에 편입된 후에도 무덤 양식처럼 보수적인 것은 그 지역의 고유 풍습이 한동안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학계의 입장이 금방 하나로 합의되긴 힘들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의 기록이 많이 없을 뿐 아니라 신라와 대가야 사이에 위치한 비화가야가 양국의 패권에 따라 정치적 입장에 변화를 줬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6세기 진흥왕에 이르러서는 창녕이 완전히 신라로 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전까지는 추측을 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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