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 리뷰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연극 ''이카이노의 눈''
역사 속에 소외된 주변부의 삶
[이성곤 연극 평론가] 2019년 일본이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을 제한하면서 한일 갈등이 극에 달했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위안부, 나아가 영토분쟁까지 얽혀 있어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런 가운데 최근 재일 코리안의 삶과 역사를 소재로 한 연극이 주목을 끈다. 창작 산실 올해의 레퍼토리로 선정된 ‘이카이노의 눈’(2020.7.2~12, 대학로예술극장소극장)이다.
| 연극 ‘이카이노의 눈’. (사진=아트리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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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일 작가의 ‘이카이노 타령’이 원작으로, 작년에 이어 두 번째 공연이다. ‘이카이노(猪飼野)’는 오사카의 대표적인 재일 코리안 거주지역이다. 이름은 1973년에 사라졌지만 장소로서의 상징성은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다. ‘돼지를 기르는 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냄새나고 불결하며 지저분한 곳. 일본 사회가 재일 코리안들에게 덧씌운 이미지가 지명에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어디 일본뿐이랴. 우리 사회도 재일 코리안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우리에게 ‘그들’은 타자이자 차별과 핍박과 가난의 아이콘이다. ‘이카이노의 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선입견에 도전하는 몇 개의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반전이 없다는 것이 반전이다. 이 작품에는 거대한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몇 개의 씨앗들이 존재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작은어머니(강애심 분)와 어머니(전국향 분)의 어색한 동거, 사촌지간인 노리히로(이시훈, 정환 분)와 마리(박희정 분)의 결혼문제, 재일 코리안 가즈코(김나연 분)와 일본인 분타(정원조 분)의 사랑, 그리고 한국 유학 중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노리히로 등. 시한폭탄처럼 보이는 갈등의 씨앗들은 배경으로 기능할 뿐 인물들의 삶을 조건 짓지 않는다. 갈등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췄다. 삶을 이어나가는 것에 우선하는 것은 없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들의 ‘전쟁같은’ 삶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겐 다소 밋밋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은 대부분 제주 4.3항쟁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성산아저씨(장성익 분)와 손문대언니(문경희 분)처럼 제주도 지명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다. ‘손문대’는 ‘선문대’의 일본식 발음인 듯하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그리고 있으나 민족이나 역사, 정체성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어머니의 한복과 손문대언니의 해녀노래, 길 제사 장면도 드라이하게 연출됐다. 굳이 일본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언어(모국어와 일본어)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족적 정서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 속에 소외된 주변부의 삶”에 더 집중하기 위한 의도다.
‘이카이노’라는 지명이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무대는 정갈하고 잘 정돈돼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매우 일본적이다. 일본식 다다미방과 좌식 테이블, 목재로 세워진 무대와 격자형 창문과 출입문. 중앙의 테이블 위에 쌓인 신발 밑창과 재봉틀만이 여기가 ‘미라이물산’이라는 가내수공업장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구상적인 실내 공간을 디자인했지만 너무 깔끔한 탓에 인물들의 삶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부작용도 있다. 마지막 이사 장면에서다. 무대 위 대소도구들이 하나둘씩 비워지지만 상실과 사라짐에 대한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카이노의 눈’은 우리가 그린 이미지와 기대에 부합하지 않기에 불친절한 재일 코리안 연극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여와 불친절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다.
| 연극 이카이노의 눈. (사진=아트리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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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이카이노의 눈. (사진=아트리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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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곤 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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