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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유정(50)이 ‘28’ 이후 3년 만에 소설 ‘종의 기원’(은행나무)을 출간했다. 살인할 때 쾌감을 느끼는 유진의 시점으로 쓴 장편이다. 정 작가는 이유 없는 살인으로 악의 실체가 되는 유진을 주인공으로 삼아 인간의 어두운 심연으로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책을 서점에 배포한 지난 토요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인근에서 만난 정 작가는 “타인의 인생을 이유 없이 망가뜨리려는 게 바로 악”이라며 “우리 모두 그런 욕구와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게 바로 성서에서 말하는 원죄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전작인 ‘7년의 밤’의 오영제, ‘28’의 박동해를 통해 악인의 전형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유진은 그녀가 만든 악인의 결정판. ‘사이코패스’라고 불리는 연쇄살인마다. 정 작가는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인간이 전체인구의 2~3%를 차지한다고 한다”며 “기본적으로 우리에게는 타인을 해하려는 악의 유전자가 있고 유진이 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정 작가에겐 어머니에게 칼을 들이대는 유진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것이 종교적·윤리적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악의 심연을 제대로 살펴야만 그 악에 대항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넘어섰다. 안나푸르나 트레킹과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것도 도움이 됐다.
소설 속에서는 연쇄살인이 일어나지만 말초적인 쾌락을 자극하는 묘사는 아니다. 유진의 어머니와 이모, 어머니가 입양해 키운 해진 등을 통해 유진의 모습을 다양한 시선으로 보게 한다. 정 작가는 “유진의 1인칭 시점이지만 어머니의 시점도 중요하게 담았다. 어머니는 큰아들과 남편의 비명횡사를 통해 유진의 실체를 파악했지만 모성애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여러 상징도 풍부하다. 유진 친형의 세례명은 미카엘로 천사, 유진의 세례명은 노엘. 이 둘은 천상의 세계와 육신의 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정신과의사인 이모는 또 다른 의미의 사이코패스고, 유진과 해진의 대비는 선과 악의 양면을 보여준다. 정 작가는 “다른 소설과 달리 이번에는 제목을 정해 놓고 시작했다”며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인물이 주변의 노력과 자신의 의지로 억제하고 살다가 결국 봉인이 풀리듯 한순간 폭발하는 과정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차기작에 대해선 “개인의 악보다 사회의 악에 대해 써보고 싶다”고 했다.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할 생각은 없는가도 물었다. 정 작가에겐 이제 대학에 들어간 아들이 있다. 정 작가는 싱긋 웃으며 살짝 광화문광장을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