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근육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마찬가지겠지만 고통은 무조건 피하고 싶다. 그런데 웨이트 트레이닝은 이런 고통 회피의 본능을 배반한다는 점에 묘미가 있다. 육체노동을 할 때 우리 몸은 가능한 한 힘이 덜 드는 쪽으로 해내려한다. 그에 반해서 웨이트 트레이닝은 일부러 힘 드는 동작을 힘이 들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완전 반대다. 이런 까닭에 몸은 이 운동을 늘 배신한다. 되도록 쉽게 해내려 갖은 꾀를 낸다.
그 수완 중 하나가 리듬이다. 여기서 리듬이란 반동을 준다는 것인데 몸을 튕기면 좀 더 쉽게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 바벨을 들어 올려 팔 근육을 단련시킬 때 몸통의 반동을 이용하면 팔이 견뎌야 할 무게의 상당 부분을 몸통이 감당한다. 결국 운동이 제대로 될 수 없고 팔 근육은 성장하지 못한다. 온전히 팔 근육만으로 들어 올릴 수 없으면 바벨의 무게를 낮추는 것이 정답이다.
핵심은 웨이트 트레이닝의 수많은 운동 가운데 오늘 이 종목을 내가 왜 하느냐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게을리 하다 보면 운동은 이상하게 변형되어 버린다. 등 근육 단련용으로 준비한 운동인데도 허투루 하다 보면 어깨 운동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 단련의 논리는 정신 단련의 과정과도 통한다. 목표 삼은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오로지 정해진 그 근육으로 하중을 감당해야만 한다. 정신의 근육으로 버텨야만 하는 여러 심란한 주제들을 대면할 때도 감정의 반동이나 손쉬운 선입견 따위의 타력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정신 근육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인체 근육은 몸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이다. 모든 요소들의 건강이 중요하겠지만 특히 근육은 살아있는 동안 내가 내 몸의 주인이 되도록 받쳐주는 물적 토대라 할 수 있다. 정신의 근육도 마찬가지다. 정신의 근육이 무너지면 우리의 생각이 흐느적거리고 춤추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몸의 근육이 나로 하여금 내 몸의 주인이 되도록 틀을 잡아주듯, 정신의 근육은 내가 내 생각의 주인이 되도록 이끌어준다.
질병 중에는 근육이 석회처럼 굳는 병이 있다. 반면에 근육이완증이라는 질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이 극에 달하면 결국 내 몸을 남에게 의탁해야만 한다. 나는 더 이상 내 몸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정신 또한 똑같은 질환에 노출될 수 있을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버릴 수도 있고, 이완되어 늘어져버릴 수도 있다. 그쯤 되면 나는 더 이상 내 생각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 내 생각의 주인 되는 권리를 내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에게 넘겨주었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실에 매달린 인형, 즉 마리오네트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인체 근육과 정신 근육을 더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 ‘확장된 자아’의 측면이다. 사회, 국가 또는 민족은 말하자면 확장된 자아라 할 수 있을 텐데 사회도 국가도 민족도 개인의 경우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정신적 근력 단련을 게을리 하면 공동체 역시 마리오네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언어를 독점한 이 나라의 지도계급은 이제 더 이상 웨이트 트레이닝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그들은 이미 석회처럼 굳어졌거나 고무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며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을 뿐이다. 정신 근육을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고민이 없다. 고민하지 않으므로 늘 결론은 쉽다. 망설임과 흔들림, 떨림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해 주는 정신 근육의 중심 요소들이 아니던가. 정신 근육의 동요는 모든 생명의 출발이며 근원이거늘, 그 근육의 단련을 포기한 이들이 넘쳐나는 공동체는 기우뚱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