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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st SRE]채권시장 뒤흔든 M&A

박수익 기자I 2015.05.12 07:00:00

삼성테크윈, SK 계열 집단에너지 등 M&A로 신용등급 쇼크

그래픽 이미나 기자
[이데일리 박수익 기자]중국 부동산업체 카이사(Kaisa·佳兆業)그룹홀딩스가 600억원의 대출을 갚지 못하고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진 사례는 올초 중국 부동산금융에 대한 우려를 짙게 드리운 사건이었지만, 국내 채권시장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궈잉청(郭英成) 카이사 회장이 사임하자, 돈을 빌려준 HSBC가 대출계약조건에 따라 대출금 상환을 요구하면서 회사 측이 디폴트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HSBC와 카이사는 궈 회장이 물러나면 대출금을 모두 갚아야 한다는 약속을 맺었다.

대출이 돈을 빌려주는 대신 정해진 이자를 꼬박꼬박 내고 성실히 원금을 갚겠다는 믿음으로 맺어진 ‘상호 약속’이듯, 회사채 역시 회사를 건실하게 운영하겠다는 약속 하에 투자금을 모집하는 행위다. 그런데 그 약속에 균열이 생기면서 최근 회사채시장도 적지 않은 혼란을 겪어야 했다. 예상치 못한 M&A로 대주주가 바뀌면서 채권자가 보유한 회사채 등급이 출렁이고, 그에따른 재산권 변동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신용등급 하락은 곧 투자자가 보유한 채권 가치의 하락으로 연결된다.

◇대주주 바뀌자 신용등급 흔들

지난해 11월 26일 삼성그룹의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이 한화그룹으로 매각되는 결정이 발표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삼성테크윈의 기업신용등급은 AA, 테크윈 지분 32.4%를 인수할 주체인 (주)한화는 A였다. 삼성종합화학이 지분 50%를 가진 삼성토탈의 등급도 AA였지만, 인수주체인 한화에너지(AA-)와 한화케미칼(A+)은 그보다 낮았다. 개별 신용등급을 평가해 부여할 때는 정상적인 대주주 지원 가능성이 반영된다. 이 때문에 대주주 변경은 크레딧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삼성테크윈 최대주주이자, 테크윈을 통해 삼성종합화학과 토탈을 간접지배하는 삼성전자는 최근 10여년간 회사채를 발행하지 않아 유효등급은 없지만 최고등급 AAA급 채권이다. 신용평가사들은 더이상 최고등급의 후광을 받기 어려워진 삼성테크윈·토탈을 즉각 등급하향 검토 대상에 올렸다.

특히 삼성테크윈은 삼성그룹의 높은 대외신인도가 회사의 신용도에 상대적으로 더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는게 신평사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신용평가회사들이 등급을 곧장 내리지 않은 것은 아직 M&A 거래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래가 마무리되면 등급 역시 새로운 대주주의 ‘키’에 맞추는 작업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21회 이데일리 신용평가 전문가 설문(SRE)내 ‘기업별 등급적정성 설문’(워스트레이팅)에서 삼성테크윈·토탈이 가장 많은 지적받은 것도 이러한 시각을 대변한다.

지난 1월 13일 SK E&S가 자체 구조조정 차원에서 평택에너지서비스 지분 100%와 김천에너지서비스 지분 80%를 사모펀드(PEF) 하나파워패키지에 매각하면서 이들 회사의 신용등급이 각각 AA에서 A+로 한단계 강등된 것도 마찬가지다.

신용평가회사들은 사업연계성이 높은 SK E&S에서 PEF로 대주주가 변경된 만큼, 유사시 지원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점을 신용등급 강등의 핵심 이유로 제시했다.

신용등급 평가때 대주주 지원 가능성 측면이 일반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금융회사의 경우, 대주주 변경은 더욱 강한 ‘폭탄’이다. 지난해 KT ENS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 KT그룹 지원 가능성이 훼손되면서 KT캐피탈과 KT렌탈의 등급이 하향조정됐고, 한국씨티그룹캐피탈도 본사의 매각 결정으로 등급 조정이 이뤄진 사례다. 대신에프앤아이도 우리금융지주(AAA)에서 대신증권(AA-)으로 대주주가 바뀌면서 등급이 한 단계 조정됐다.

◇모기업 바뀌며 등급상향도…방향 예측 어려워

모든 M&A가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우량한 부모’로 대주주가 바뀌면서 오히려 신용등급이 올라간 곳도 있다. 현대로지스틱스가 대표적이다.

현대로지스틱스는 지난해 9월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됐고, 현재 일본계 오릭스(35%)와 롯데그룹 계열(35%) 등으로 구성된 ‘이지스(Igis)1호’가 지분 88.8%를 가지고 있다.

지배구조상 이지스1호가 ‘가교’ 역할을 하고 있지만, 향후 롯데그룹의 지분 추가 확보가 진행될 경우 대주주 지원가능성으로 연결되면서 등급 상향 가능성도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로지스틱스는 21회 SRE 기업별 등급적정성 설문에서 단 3표(1.7%)만 받았다. 채권시장 관계자 대부분이 이 회사의 신용등급이 M&A 이후 ‘BB+~BBB’ 급에서 ‘BBB+’로 오른 것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지난해 3월 GS그룹에 인수된 GS이앤알도 재무적으로 어려운 모기업 품을 떠나 새 부모를 찾으면서 신용등급이 올라간 경우다. 이 회사의 전신은 STX그룹 계열 STX에너지였다. 도레이그룹에 인수된 도레이케미칼(옛 웅진케미칼)도 지난해 2월 대주주가 웅진홀딩스에서 도레이첨단소재로 바뀌면서 대주주의 지원 가능성이 평가요인에 새롭게 반영됐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등급조정의 트리거가 되는 M&A의 방향성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의 고민도 깊어진다. 해당 회사는 수익성과 성장성이 양호하더라도 대주주의 상황이 어려워지거나, 다른 사업을 위해 처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주들로 구성돼 있어 주주들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대주주가 바뀔 수도 있다.

◇“대주주 변경, 기한이익상실 사유”

주식시장에서는 최대주주의 중대 의사결정에 반대매수청구권과 같은 투자자 개인의 선택권을 부여하고 있지만, 채권시장에서는 소집부터 까다로운 채권자집회 외에는 사실상 투자자 개인이 의사결정에 찬반을 표시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한 외국계운용사 애널리스트는 “외국에서는 기한이익 상실조항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해석되는 것에 비해 국내에선 아직 문제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며 “회사경영이 점진적으로 나빠져서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것은 투자자가 수익의 대가로 짊어져야 하는 정상적 위험부담이지만, 예상치 못한 경영진의 판단으로 신용도가 약해지는 상황에서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채권자 보호절차가 미흡한 것은 국내 채권시장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분석도 있다. 한 SRE 자문위원은 “시장이 미성숙했다기 보다는 회사채시장에서는 투자자가 자잘하게 흩어져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라며 “글로벌 시장처럼 과점화돼있으면 진작에 보호절차가 강화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21회 이데일리 신용평가 전문가 설문(SRE)에서는 이러한 채권시장의 흐름을 반영한 설문도 실시했다. 최대주주 변경과 기업 간의 M&A가 잦아지는 상황에서 채권자 보호 절차에 대한 견해를 물은 결과, ‘사채모집위탁계약서 상 기한이익 상실조항에 최대주주 변경 건을 기입해야한다’는 강성 응답이 45%(173명 중 78명)으로 나타났다.

HSBC가 최고경영자 변경을 대출상환조건으로 내걸었듯, 채권시장에서도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대주주가 바뀌면 회사 측에 만기 전이라도 채무금액을 일시 상환하도록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채권자집회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응답도 33%(57명)에 달했다. 채권시장 크레디트애널리스트, 채권매니저·브로커 등으로 구성된 SRE 응답자 10명 중 8명(78%)꼴로 ‘현 제도는 채권자 보호 측면에서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자문위원은 “현실적으로 채권자집회를 여는 것조차 쉽지 않다”며 “상법상 채권자집회 조항을 완화하는 것이 전제돼야 기한이익 상실조항을 강화하는 것도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막상 기한이익 상실조항이 강화되더라도 채권자 집회를 경유해 문제를 제기해야하는데 현행법상에는 다수의 채권자들이 의사를 모아야하는 현실적 장벽에 부딪힐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지나치게 엄격한 채권자 보호 조항은 역효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 예컨대 생존을 위해 대대적 구조조정이 필요한 A 그룹에서 B 계열사를 매각해야 하는데 그동안 발행한 채권을 모두 상환(기한이익 상실)해야 한다면 해당 그룹은 구조조정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이번 설문에서 ‘채권투자자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혼선을 줄 수 있다’(11%), ‘현재 충분히 잘 이뤄지고 있다’(8%)는 응답이 19%에 달한 점도 채권자 보호 강도가 지니는 양면성을 반영한다.

◇금융신뢰도, 투자자보호와 같이가야

그럼에도 채권시장의 발달, 더 나아가 금융의 신뢰라는 측면에서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커버넌트(발행사가 채권자 보호를 위해 준수해야 하는 사항) 제도에 대해 이제부터라도 본격적으로 고민해야한다는 것이 이번 SRE 설문 결과로 나타난 ‘민심’이다.

회사가 정말 어려워서 망가져 가는 도중에 채권자 보호제도가 미흡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커버넌트 조항을 강화해서 경영진의 무리수로 시장의 신뢰를 흔드는 것을 막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주주 변경에 따른 기한이익 상실에 대해 금융당국의 유권 해석도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자문위원들은 “현재 국내는 커버넌트 조항에 대한 시장의 통일된 견해도, 금융당국의 유권해석도 없는 상황”이라며 “금융시장의 신뢰도는 투자자보호와 같이가야하는 만큼, 발행사도 당국도 본격적으로 고민해야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21회 SRE’(Survey of Credit Ratings by Edaily)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21회 SRE는 2015년 5월11일자로 발간됐습니다. 문의: stock@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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