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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어느 날이다. 햇살은 빛나고 하늘은 투명한, 무엇을 해도 막힘이 없을 듯 청명한 날. 사실 우린 속고 있는 거다. 햇살과 하늘과 청명에. 바로 여기 걸린 사진들이 그리 말하고 있다. 배경도 시차도 다르지만 우린,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고. 그래. 빌딩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울이란 데와 암스테르담이란 데가 이처럼 긴밀히 공명한 적이 있던가. 우선 그 이야기부터 좇아가봐야겠다.
오전 9시15분. 한 남자가 집 현관문을 나선다. 무채색 긴 코트에 하얀색 뾰족한 고깔을 쓰고 흰 장갑을 끼었다. 얼굴도 하얗다. 분칠을 했나 보다. 붉고 두껍게 눈과 입을 부풀리진 않았지만, 영락없이 광대분장이다. 저 복장에 저 얼굴로 저이는 어디로 가는 걸까.
오전 9시45분. 그 남자가 보인다. 마트에라도 온 건가. 쇼핑카트를 밀면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차 한 대 없는 주차장이다. 별 의미 없는 흰 라인이 되레 신경을 긁는다. 남자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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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50분. 마트 안. 남자가 상품을 고르고 있다. 그런데 어쩌나. 식품매장은 텅 비어 있다. 이미 수많은 손들이 쓸어갔을 매대에는 몇 가지 상품만 널브러져 있다. 남자의 얼굴에선 실망과 불안이 교차한다.
오전 10시5분. 계산대를 빠져나가는 남자. 혼이라도 뺏긴 듯 눈에는 초점이 없다. 투명 아크릴판 너머로, 남자처럼 허연 얼굴에 고깔을 쓴 직원이 앉아 있다.
오전 10시15분. 멀찌감치 삐죽이 선 고깔이 보인다. 남자는 호수가 있는 공원의 한 벤치에 앉아 있다. 더 이상 표정을 읽을 순 없다. 처진 어깨의 외롭고 쓸쓸한 뒷모습뿐이다.
오전 11시15분. 남자가 벽을 마주보고 섰다. 사실 ‘마주보고’란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 그는 벽을 보지 않고 있으니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구부정한 그 모습이 남자 뒤쪽에, 스스로 설치했을 카메라에 찍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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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30분. 등을 돌린 채 섰던 남자의 ‘면벽’이 사진에 찍혔다. 비로소 실체가 드러나는 고깔의 정체. 두꺼운 종이를 찢어 돌돌 말아낸 것이었구나.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하는 법이다. 절망, 아니 공포인지도 모르겠다.
△음습한 검푸른 빛에 띄운 ‘코로나 공포’
서울 종로구 삼청로 공근혜갤러리. ‘어느 날 그 남자’의 행적은 이곳에 걸렸다. 물론 그 흔적에 얹은 불안과 절망, 두려움까지 따라왔다. 네덜란드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61)의 사진작품에 말이다. 맞다. 이날의 모든 과정은 작가가 직접 스스로를 촬영해 남긴 기록이다. 희대의 광대로 자신을 포장해 모델로 세우고 배경을 연출했단다. 그러곤 일기를 쓰듯 시간대별로 사진으로 뽑아내고 사각프레임에 가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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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이런 작업을? 그에게 동기를 부여한 건 다름 아닌 ‘코로나19’다. 한국에서 개인전까지 열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나라 밖으론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촉촉한 메시지만 날려 왔다. “2020년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초현실적인 악몽에서 깨어났다”고. “두려움과 무력감이 몇 주간 나를 지배했고, 전시는 그때 나를 마비시켰던 감정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게 그저 ‘만우절’ 거짓말이었으면 했다”고. 그래서 전시타이틀을 ‘2020년 만우절’(April Fool 2020)이라고 했단다. 만우절. 어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날이 아닌가. 비록 자신이 희화화될지언정 패닉에 빠진 이 미친 풍경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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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가 ‘포스트 코로나 특별기획전’으로 꾸린 전시에는 올라프의 사진작품 10여점 외에도 20분짜리 영상을 걸었다.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그 어느 날’의 오전은 지난 4월에 촬영한 사진이, 오후는 7월에 제작한 영상이 기록한다. 한 점 한 점 건너뛰며 현장을 보이는 사진과 달리, 3개의 패널로 나뉜 영상에선 두 가지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있음’을 알린다. 15개국 언어로 코로나 특보를 전하는 라디오 방송, 그 말소리를 따라 계속 방안을 뱅뱅 도는 작가 자신. 이게 바로 전시상황이란 게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작가에겐 지병이 있다고 했다. 선천성 유전적 폐질환이라는데. 그러니 그이에게 코로나는 공포감은 그 이상이었을 터. 영영 작업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경제적 두려움부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건강에 대한 염려까지 겹쳐. “마치 결말을 알 수 없는 공포영화 속 중요치 않은 엑스트라가 된 것 같다”는 게 결코 엄살이 아니었던 거다. 어쨌든 극복을 했다고 해야 할까. 그 손끝에서 이토록 절절한 드라마가 탄생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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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과연 절망뿐인가
올라프는 네덜란드가 아끼는 세계적인 사진작가다. 기자로 활약하다 작가로 전업을 했다는데, 순발력에 연출력을 가미한 출중한 실력을 드러낸 셈이다. 1988년 ‘체스맨’ 시리즈로 받은 ‘젊은 유럽 사진작가상’을 시작으로 수상경력이 줄줄이다. 지난해 60세 생일에 맞춰 네덜란드 정부가 황금사자 기사작위 훈장을 수훈했을 정도라니. 한국에선 전속화랑인 공근혜갤러리가 2년에 한 차례씩 개인전을 열고 있다.
이번 만우절 연작에 나선 모든 작품은 ‘C프린트’라 부르는 크로모메릭 프린트로 빼낸 것이란다. 촬영 후 보정한 게 아니라 현장을 사전에 완벽히 세팅해 색감을 갖춘 게 특이한 점. 전체적으로 감도는 음습한 푸른빛조차 작가가 의도했단다. ‘코로나블루’라 하는 그 우울감의 색조를 내보이고 싶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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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록인 동시에 개인의 기록. 이번 신작은 작가에게 그래서 여러모로 특별하다. 간혹 셀프 포트레이트를 진행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본격적으로 ‘나 홀로’ 나선 것도 처음이라니. 그런데 과연 이 시대는 절망뿐인가. 아니란다. 절망이 그렇게 찾아왔던 것처럼 어느 날 ‘희망’도 보이더라고 했다. 작업을 시작한 뒤 여기저기서 안부전화가 오고, 소원했던 관계가 돈독해지고. 반성과 성찰도 했단다. “사재기로 인해 텅 빈 상점의 선반은 수십년 간 모든 게 그렇게 유지됐을 거라고 믿어왔던 나 자신을 깨닫게 했다”고 했다.
결국 인간의 오만에 대한 자연의 심판이 이렇게 찾아들 줄은 몰랐다는 게 작업의 마무리이자 지향점인가 보다. 상황종료. 그이의 기록은 여기서 끝났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작가는 어렴풋한 희망을 봤다. 우리는 어느 쪽을 볼 건가. 전시는 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