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 한 신사업담당자는 “미래에는 굳이 큰 매장을 지을 이유가 없어질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자판기다. ‘캔 음료’로 대표되던 자판기 판매물품이 점차 다각화될 것이란 얘기다. 전망은 벌써부터 현실화하고 있다. 의류와 화장품, 신선식품에 이르기까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품목들이 자판기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입지 경쟁 지친 패션업계, 자판기 테스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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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090430) 브랜드숍 이니스프리는 디지털자판기 ‘미니숍(mini shop)’을 운영 중이다. 이니스프리의 화장품 체험공간인 ‘그린라운지’ 여의도점과 CGV왕십리점에 미니숍을 설치했다. 미니숍 판매제품은 브랜드숍에 진열된 제품보다 소용량으로 포장해 가격이 저렴하다. 소비자는 몇 번의 터치만으로 원하는 제품을 선택해 결제할 수 있다. 이니스프리는 오프라인 매장이 들어서기 어려운 장소에 미니숍을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다.
유니클로는 ‘의류 구매 자판기’를 미국 공항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는 45개 매장의 매출이 점차 둔화하자 의류 자판기를 돌파구로 들고 나온 것. 현재 오클랜드 공항을 비롯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 총 10개 도시에 자판기 ‘유니클로 To Go’를 설치했다. 판매 제품은 유니클로의 주력 제품인 ‘히트텍 셔츠’와 ‘울트라 다운재킷’ 등 2종이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상품은 매장이나 우편으로 반품할 수 있다.
◇ “점원 싫다”…‘언택트’ 추구하는 1인 가구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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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이 짧은 신선식품도 자판기로 들어왔다. 농협경제지주는 자판기로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시스템을 도입한다. 자판기에 IoT(사물인터넷) 식육 스마트 판매시스템을 적용해 자판기 내 재고와 가격, 적정온도 등을 사람 없이 관리할 수 있다. 판매 품목은 국산 쇠고기와 돼지고기 등 20여종이다. 농협은 우선 중앙회 본관과 서대문구 지역에 자판기 2대를 설치해 시범 운영하고, 2020년까지 1인 가구 밀집 시설을 중심으로 모두 2000대를 설치할 계획이다.
농협 관계자는 “최근 1인 가구 증가 등으로 소량 구매가 늘어나고 있고, 중간 유통과정 생략으로 점포 임대료와 인건비 등을 절감할 수 있어 스마트 판매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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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어난 인건비…“무인기계 더 확산할 것”
유통업계가 자판기 설치에 나선 이유 중 하나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어서다. 특히 아르바이트 고용이 필수적인 편의점은 무인화 시스템 선제 적용업종으로 꼽힌다. 국내 편의점사는 현재로선 자판기사업 추진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지방 소도시 등 인구가 적은 지역에 가정간편식(HMR) 자판기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다. 실제 한국 편의점 사업자들이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는 일본 최대 편의점업체 세븐일레븐재팬은 내년 2월까지 오피스 빌딩과 공장 내에 김밥과 샌드위치, 빵 등을 판매하는 자판기 100대를 설치하기로 했다. 2019년 2월까지 자판기를 500대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침체기에 접어든 자판기 산업이 유통업계의 ‘이색 자판기’ 시도로 반등할 수 있을지 여부도 주목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난해 발행한 식품의약품통계연보에 따르면 2015년 전국의 자판기 개수는 3만4556대다. 2013년(4만3778대)과 비교하면 2년 새 1만여대 가까운 자판기가 줄었다. 커피전문점 등 프랜차이즈 식음업체가 증가하면서 음료자판기가 감소한 탓이다.
김보원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시장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 유통 기업들이 수익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투자를 신속하게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특히 물류·운영 시스템을 개선해 인건비를 줄여나가는 등의 혁신이 시급해졌다. 이 과정에서 현재와는 다른 형태와 목적의 무인 기계가 점차 확산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