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시·아시아·여성…美, 김혜순 시인에 왜 주목하나

김미경 기자I 2024.03.25 08:09:56

김혜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
한국 작가, 번역시 최초 수상
"아시아 여자에 시상, 놀랍고 기뻐"
"최근 10년 해외서 가장 많이 읽히는 시인"
시력 45년 김혜순 ‘시 하다’
“여성 목소리, 세계적 보편으로”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 1975년 상 제정 이래 한국 작가로서는 첫 수상이자, 번역 시집이 이 상을 받은 것도 전례가 없다.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들러리’가 아니었다. 미국 평단이 영어권 문학 주변부로 치부했던 아시아 여성의 시(詩)에 주목했다.

시인 김혜순(69)이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시 부문을 받았다. 1975년 협회상 제정 이래 한국 작가의 첫 수상이다. 시 부문 상이 만들어진 뒤 번역 시집이 이 상을 받은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The National Book Critics Circle·NBCC)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뉴스쿨에서 열린 ‘2023 NBCC 어워즈’에서 시 부문 유일하게 번역 시집으로 최종 후보에 올랐던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Phantom Pain Wings·영문판)을 최종 수상작으로 호명했다. 미국 평론가들이 매해 미국에서 영어로 쓰인 ‘지난해 최고의 책’을 시·소설·논픽션·전기·자서전·비평 부문별 선정해 상을 준다.

이날 시상식에 불참한 김혜순 시인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전혀 수상을 기대하지 못했다. NBCC에 시 부문이 생겨나고 번역본이 수상한 게 최초라고 한다. 아시아 여자에게 상을 준 것이 놀랍고 기쁘다”며 “훌륭한 번역으로 오래 함께해온 최돈미씨에게 감사하다”는 짧은 소감을 남겼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는 시집에 대해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대담하게, 전쟁과 독재의 여파,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삶의 고통, 이를 극복하는 의식을 대안적 상상의 세계로 반영한다”고 평가했다.

김혜순 시인이 등단 40주년이던 2019년 펴낸 시집 ‘날개 환상통’(왼쪽)과 미국에서 번역 출간한 영문판 ‘팬텀 페인 윙즈’(Phantom Pain Wings)의 표지(사진=문학과지성사·한국문학번역원 제공).
‘날개 환상통’은 김 시인의 13번째 시집이다. 등단 40주년인 201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냈다. 지난해 5월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출간된 뒤 현지 평단으로부터 호평받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미국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시집 5권’에도 꼽혔다.

한국계 미국 시인 최돈미가 번역했다. 최 시인은 김 시인의 시집 7권을 번역하며 함께 호흡했다. 곽효환 한국문화번역원장은 “김 시인은 국제상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시 부문에서 벌써 다섯 차례 수상하며 문화적 장벽을 넘고 있다”며 “최돈미 번역가처럼 한국어와 영어에 모두 밝은 번역가들의 등장으로 번역의 질이 높아지면서 국제상에 자주 호명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했다.

김혜순 시인은 ‘시 쓴다’ 하지 않고, (몸이) ‘시 한다’(doing)고 표현한다. 진리(제도)로서 굳어진 것, 당연시되는 것, 남성적 시작법의 거부다. 여성의 몸과 언어를 탐구하며 다른 말하기 방식을 고민해왔다. 그는 시론집 ‘여성, 시하다’(2017)에서 “‘시한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내 몸인 여자를 찾아 헤매고, 꺼내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와 다름이 없다”고 했다.

문단계에서는 영어권 문학 시장에서 비주류였던 시·아시아·여성을 호명한 것을 두고 “문학적·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평했다. 김 시인의 시 세계가 세계문학 시장에서 언어적 편견 없이 시의 현재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문학평론가인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김 시인에 대해 “지난 10년간 가장 많이 해외에 소개되고 상을 많이 받은 시인이자, 한국 문학의 동시대성을 획득한 작가”라며 “여성들의 몸에서 터져나오는 발화가 세계적 보편성을 갖고 세계 독자들의 호응을 받는다는 지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날개 환상통’ 해설을 통해서는 “김혜순의 시는 돌파를 멈춘 적이 없다. 김혜순은 제도화된 역사들과 가장 먼저 ‘작별’하는 시적 신체의 최전선에 있었다. 적어도 지난 40년 동안 문학 언어의 정치적 급진성에 있어 김혜순보다 뜨거운 언어를 찾기란 쉽지 않다”고 평했다.

김 시인은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입선한 뒤 1979년 문학과지성(계간)을 통해 시단에 나왔다. 이후 ‘또 다른 별에서’(1981),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1985), ‘우리들의 음화’(1990), ‘불쌍한 사랑 기계’(1997), ‘한잔의 붉은 거울’(2004), ‘피어라 돼지’(2016), ‘죽음의 자서전’(2016),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 등의 시집을 냈다. 1989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돼 2021년까지 강단에 섰다. 김수영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삼성호암상 예술상 등 국내외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다.

2019년 6월6일(현지시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2019 그리핀 시문학상’ 시상식에서 최종 수상소감을 말하는 김혜순(왼쪽) 시인과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번역한 최돈미 시인 겸 번역가(사진=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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