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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 미술평론가] 세계를 덮친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새해를 맞았습니다. 설 명절을 쇠면 온전히 새해가 다시 열리는 겁니다. 새해가 되면 그해 띠를 상징하는 동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올해는 신축년(辛丑年), 소띠 해입니다. 소는 농경생활을 위주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농사에서는 필수적인 노동력이고 일상에서는 귀중한 운송수단이었습니다. 시골에서는 농토를 제외하면 자산1호였기에 이집 저집에서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낸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왔습니다. 소에서 인간이 얻은 혜택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서는 노동력과 우유를 제공했고,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을 제공했습니다. 남은 뼈는 공예품으로 사용했습니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를 한집에 사는 식구란 뜻으로 생구(生口)라 부르기도 했고 정월대보름에는 사람과 똑같이 오곡밥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소는 우리 생활과 매우 가까웠기에 그림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려불화, 조선의 회화, 한국 근현대의 조각·회화작품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등장합니다. 그중 퇴촌 김식(1579∼1662)의 대표작 ‘고목우도’(枯木牛圖)를 살펴보는 건 꽤 의미있는 일입니다. 김식은 조선중기 문인화가로 ‘조선시대 소 그림’의 일인자로 불렸습니다.
△늙은 나무와 젊은 소, 대비가 의미하는 것은…
화면 왼쪽에 고목이 한 그루 서있습니다. 비쩍 마른 고목에 잎과 줄기는 다 없어졌고 가지만 세 개가 남았습니다. 그 나무 아래 가족으로 보이는 소 세 마리가 있습니다. 엄마 소는 뒤태를 보이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튼실한 엉덩이가 돋보입니다. 살찐 엉덩이 아래서 송아지가 그 어미의 젖을 빨고 있습니다. 크기로 보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송아지 같습니다. 그 옆에서 젖을 빨고 있는 송아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소는 아빠 소처럼 보입니다. 젖을 잘 빨고 있는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 소 가족 뒤로는 아스라이 키 큰 나무 세 그루가 보이고 저 멀리 산 능선이 펼쳐져 있습니다. 엄마·아빠 소는 뿔 모양으로 볼 때 한창 나이의 젊은 소입니다. 코뚜레와 멍에도 없어 아주 자유롭고 편안해 보입니다.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목가적인 풍경입니다.
종이에 엷게 색을 올린 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목은 먹의 농담에 강약을 줘 밋밋하지 않고 옹이와 아래쪽에 노출된 뿌리까지 표현해 사실감을 높였습니다. 그 아래 소들을 배치한 이유는 소와 나무를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늙은 나무와 젊은 소, 살집이 튼실한 소와 비쩍 마른 나무. 이런 대비는 작가의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나무를 표현할 때 가지 끝이 갈라지는 모습은 조선중기에 유행했습니다. ‘절파화풍’의 특징입니다. 다만 소의 뿔은 한국 소의 생김새와는 다른 중국 물소의 뿔 모양입니다. 조선중기까지 그려진 회화에는 이렇듯 중국 화풍의 영향이 남아있는 작품이 많습니다. 이런 중국풍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점차 조선의 고유한 표현으로 대체됩니다.
만약 여기서 끝난다면 평범한 소 그림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현대에서까지 눈여겨보게 하는 하이라이트는 김식이 양념처럼 얹은 독특한 표현입니다. 소 눈동자 주위에 만든 흰 여백, ‘X’자로 표현한 코, 진한 스타킹을 신은 듯한 발목 등은 김식만의 소 그림이 가진 특징입니다. 이런 특징은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진 것입니다. 김식의 조부는 그림 실력으로 유명했던 양송당 김시(1524∼159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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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역과 천연두를 함께 극복하다
큰 몸집과는 달리 소는 의외로 전염병에 취약한 가축입니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우역(牛疫)이란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지금도 구제역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6세기부터 우역이 발생해 매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피해상황은 당시의 실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평안도의 소들이 거의 대부분 병으로 죽었고 황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봄·가을에 퍼진 소의 전염병으로 수천 마리가 병들어 죽었기 때문에…”(‘중종실록’ 중종36년 1541년 기사), “평안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었다”(‘인조실록’ 인조14년 1636년 기사), “1637년, 1638년 우역으로 죽은 농우가 3분의 2에 달한다”(‘광해군일기’ 인조20년 1642년 기사).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만 우역에 대해 96번이나 언급할 만큼 소의 전염병은 국가적 큰 문제였습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먼저 나타나는 점으로 봐, 또 북에서 남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퍼지는 경로로 봐, 당시 우역은 중국 쪽에서 전파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인조 때 우역은 그 전파경로가 정묘호란·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의 이동경로와 일치하는 점에서 중국발 전염병이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역이 창궐하자 죽기 전에 차라리 고기로 먹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 멀쩡한 소까지 죽이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 소가 터무니없이 줄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습니다. 결국 조정에서는 소를 외국에서 사 오기로 결정하고 1638년 무관인 낭청 성익을 앞세워 몽고로 파견합니다. ‘승정원일기’는 이때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몽고산 소 181마리를 사오는 데 성공해 농가에 나눠줬다고 했습니다. 사신을 외국에 파견해 소를 사온 일은 소가 조선사회에 얼마나 중요한 가축인지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우역은 조선을 통해 일본까지 전파됐는데 마침내 20세기 초 백신의 보급으로 완전히 사라집니다.
△소의 안녕은 곧 국가의 안녕
세계사를 통틀어 볼 때 소와 전염병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두창(痘瘡·천연두)이라 불리는 전염병일 것입니다. 오래전 이집트 미라에서도 발견된, 인류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인 두창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역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질병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왕실과 양반, 노비 등 신분에 상관없이 걸리면 30%가 죽음에 이르렀고 낫더라도 피부에 수많은 흉터(곰보자국)를 남기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이 두창은 ‘우두법’(牛痘法)을 발견하며 극복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소에서 찾아낸 방법이었습니다. 영국의사 에드워드 제너(1749∼1823)는 소젖을 짜는 처녀들은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우두에 걸린 소의 젖을 짜는 소녀의 농포에서 고름을 빼 일부 소년에게 접종했습니다. 이때 실험 대상에는 제너의 아들도 포함됐습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우두법은 점차 발전하고 인류는 두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루이 파스퇴르가 사용한 ‘백신’(vaccine)이란 말이 ‘암소’를 뜻하는 라틴어 ‘바카’(Vacca)에서 유래했듯, 소와 인간은 전염병과의 전쟁을 함께 이겨내온 오래된 전우이자 동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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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이 ‘고목우도’를 그린 때는 조선에서 우역이 가장 심했던 17세기 초입니다. 소들이 맥없이 다 죽어나가는 마당에 건강하고 튼튼한 소가 새로 태어난 송아지를 잘 건사하는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소의 안녕이 농가·국가의 안녕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같은 바람은 소를 십이지신의 하나로 당당히 서게 합니다. 소의 타고난 기운과 성정으로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로 말이지요. 이는 또 다른 회화작품 ‘십이지신도(축신 벌절라대장)’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새해에 들어서도 코로나 위력은 여전합니다. 백신이니 치료제니 하는 뉴스는 연일 들리지만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합니다. 힘겨운 이 시절,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무거운 짐을 견디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소의 기운처럼 어려움을 견디고 주위를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협력하다 보면 결국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김식의 ‘고목우도’는 늙고 메마름이 끝나면 기운이 생동하는 봄이 온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손태호 미술평론가는…
30대 중반 도망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살이가 버겁고 고달파서. 막막하던 그 시절, 늘 그렇듯 삶의 퍼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풀렸다. 그즈음 눈에 띈 옛 그림이 우연이었고 그 흔적을 좇아 미술관·고서화점 등을 누비고 다닌 게 필연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찍힌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을 보고 어째서 ‘그림이 삶, 삶이 그림’이라 하는지 깨달았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의 길은 그날로 접혔다.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로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미술 전문가가 됐다. 조선회화·불교미술에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스민 상징 같은 ‘옛 그림’은 거울로 곁에 뒀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로 있으면서 이론·현장을 연결한 연구, 인물·지리·역사를 융합한 글과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불상의 탄생’(한국학술정보·2020),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아트북스·2017), ‘나를 세우는 옛 그림’ (아트북스·20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