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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교수는 쌀·재난·국가의 상호작용을 불평등의 기원으로 삼았던 걸까. 그는 “반복되는 재난에 맞서 먹거리를 유지하는 활동이 불평등 구조가 진화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고 압축했다. 벼 농사는 파종부터 수확까지 매 단계에 노동력을 짧은 시간 안에 많이 투입해야 했기에 협업이 필수적이었다. 또 가뭄 같은 재난에 함께 협력하는 것도 중요했다. 따라서 선조들은 서로를 농촌 공동체로 인식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숙련도 혹은 기여도에 따라 수확량을 나누기보단, 같은 연차내에서 평등하게 나눴다. 연공제의 탄생이었다.
여기에 과거제가 더해지면서 지금의 학벌주의까지 생겼다고 이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과거 수확량 경쟁에서 농사 이외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급제였다”며 “왕의 토지를 하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제의 중요성은 현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시험을 잘 쳐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평생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은 사회가 많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숙련된 노동보단 학벌이 인정받는다”며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벼농사 문화의 긍정적 측면도 있다. 이 교수는 “재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을 꼽았다. 코로나19가 창궐했던 초기부터 한국은 다른 국가에 앞서 마스크 착용을 일상화했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서로 눈살을 찌푸리며 지적을 했다. 그는 “이 역시 벼농사 문화에서 생긴 강력한 상호 감시체계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벼농사 문화권에서 코로나19 대처를 전반적으로 잘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일본은 방역에 실패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그는 “다른 서양권 국가들에 비하면 잘하고 있는 편에 속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