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용익의 록코노믹스]롤링스톤스처럼 경영하라

피용익 기자I 2018.03.31 09:10:11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끈 밴드는 비틀스와 롤링스톤스였다. 다만 비틀스가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짧은 역사를 남기고 단명한 반면, 1964년 데뷔한 롤링스톤스는 반세기가 지난 아직까지도 활동 중이다.

2017년 기준 롤링스톤스 멤버인 믹 재거(보컬), 키이스 리처드(기타), 찰리 와츠(드럼), 로니 우드(기타)의 평균 연령은 73세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건재하며, 하룻밤 공연에 1000만 달러를 벌어들일 만큼의 인기를 끌고 있다. 롤링스톤스는 12개 도시에서 진행한 ‘노 필터’ 투어를 통해 총 1억2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공연당 평균 매출은 U2보다 100만달러 가량 많았고, 콜드플레이의 2배를 넘어섰다.

롤링스톤스는 하나의 사업체나 다름없다. 밴드 멤버들은 기업의 임원처럼 공연, 레코딩, 퍼블리싱, 스폰서십 등 분야를 각각 전담하고 있다. 매니저와 운전기사는 물론 회계사와 변호사도 고용하고 있다. 심지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법인을 세우기도 했다. ‘두꺼운 입술 사이로 혀를 내민’ 로고는 맥도날드나 애플의 로고만큼이나 유명하다.

롤링스톤스가 50년 이상 탄탄한 브랜드 파워를 유지하면서 꾸준한 매출과 이익을 내고 있는 현상은 후배 뮤지션들은 물론 기업 경영자들로부터도 주목받고 있다.

적어도 롤링스톤스의 장수 비결이 믹 재거가 런던정경대(LSE) 경영학과에 다녔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졸업 후 교사나 기자, 정치인이 되려던 꿈을 포기하고 음악 생활을 위해 대학을 중퇴했다. 경영학을 공부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믹 재거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사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며 “공부를 좀 해보고는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얼마나 지루한 일이겠느냐”고 말했다.

‘괴짜 경제학(Freakonomics)’의 공동 저자인 스티븐 더브너는 믹 재거의 리더십을 주목했다. 그는 2007년 블로그에 쓴 글에서 “믹 재거는 비즈니스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극도로 똑똑하다”며 “재거의 리더십 하에서 롤링스톤스가 가장 잘 한 것은 순회공연과 관련해 기업적 접근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더브너에 따르면 대중음악의 매출은 크게 두 곳에서 발생한다. 하나는 음반 판매이고, 다른 하나는 공연 수입이다. 그런데 음반은 얼마나 팔릴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음반사와 배급사 등 수익을 배분해야 할 곳도 많다. 이에 비해 공연을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만 안다면 티켓 판매뿐 아니라 기업 스폰서, 티셔츠 판매 등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다.

롤링스톤스가 음반 판매보다 공연 활동에 주력하는 것은 밴드의 최고경영자(CEO) 격인 믹 재거의 경영 전략 때문이라는 게 더브너의 설명이다.

비슷한 이유로 경영 전문지 포춘은 2002년 기사에서 “롤링스톤스가 기업이었다면 ‘캐시카우’가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개발한 경영 진단 매트릭스에서 캐시카우는 ‘투자비용을 모두 회수하고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캐시카우로 분류되는 제품은 잘 다져진 브랜드 명성이 있고, 신규 투자 자금이 많이 필요 없으며, 현금 흐름이 좋다.

실제로 롤링스톤스는 1994년 ‘Voodoo Lounge’ 이후 20년 넘도록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최근 발표된 앨범은 모두 라이브 앨범이나 리메이크 앨범 등이다. 음반 제작이라는 신규 투자가 없이도 그동안 만들어 놓은 히트곡들을 토대로 끊임없이 돈을 벌고 있는 캐시카우인 셈이다.

캐시카우를 키우는 전략 외에도 롤링스톤스가 주는 경영학 교훈은 많다. 논픽션 작가인 리치 코언은 2016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비즈니스 성공을 위한 롤링스톤스의 가이드’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가 소개한 롤링스톤스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 롤링스톤스의 원래 이름은 ‘리틀 보이 블루 앤 더 블루 보이스’였다. 그러나 너무 길고 어려웠다. 당시 리드 기타리스트였던 브라이언 존스는 자신이 좋아하던 블루스 뮤지션인 머디 워터스의 노래 ‘Rollin′ Stone’으로 밴드 이름을 변경했다. 이후 매니저가 약간의 수정을 더해 ‘Rolling Stones’라고 이름붙였다. 이 이름은 밴드의 음악이 지향하는 바를 잘 보여줬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네이밍으로 평가받는다.

둘째. 시장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1960년대는 비틀스의 세상이었다. 누구나 비틀스처럼 되고 싶어했다. 롤링스톤스는 다른 길을 택했다. 비틀스가 ‘엄친아’ 분위기를 풍길 때 롤링스톤스는 ‘반항아’의 이미지를 내세웠고, 비틀스가 ‘사랑’ 노래를 부를 때 롤링스톤스는 ‘섹스’를 노래했다. ‘틈새 시장’을 파고든 것이다.

셋째. 구걸하거나 빌리거나 훔쳐라. 롤링스톤스는 커버 밴드로 시작했다. 다른 뮤지션의 곡을 연주하면서 가사를 바꾸곤 했다. 이들의 첫 싱글 “The Last Time”도 사실은 스테이플 싱어스의 “This May Be the Last Time”을 토대로 만든 곡이었다. 록 사운드를 입히고 템포를 빠르게 하면서 가사를 새로 붙인 이 곡은 롤링스톤스 신화의 출발점이 됐다.

넷째. 침몰하기 전에 닻을 잘라라. 롤링스톤스는 원래 브라이언 존스가 주축이 된 밴드였다. 하지만 존스가 마약 문제를 일으키자 나머지 멤버들은 그를 해고했다. 존스는 그로부터 한 달도 되지 않아 마약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비록 무자비한 결정이었지만, 문제의 싹을 제거해 장수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다섯째. 계속해서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롤링스톤스는 최소한 5번의 변화를 거쳤다. 커버 밴드에서 출발해 시대별로 팝, 애시드, 그루브, 뉴웨이브 등의 스타일을 보여줬다. 계속된 변화는 롤링스톤스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줬다.

코언은 “롤링스톤스는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수익성이 있고, 영속성이 강한 기업”이라며 “장기적인 사업을 하려는 경영자나 기업인들은 이 다섯가지 교훈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롤링스톤스 ‘노 필터’ 투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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