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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고려 요소 중 하나는 차기 주자가 현직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 여부입니다. 아무리 임기말 레임덕에 시달리는 대통령일지라도 역시 대통령의 파워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실제 현직 대통령이 무작정 비토하는 차기 주자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정동영 국민의당 의원입니다. 반면 현직 대통령과 관계설정에 성공하면서 대박을 터뜨린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노무현과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김영삼 vs 이회창…노무현 vs 정동영, 불편한 관계 탓에 대선실패?
97년 대선은 참 이상한 대선입니다. 흔히 IMF 사태라고 부르는 단군 이래 초유의 국가부도 위기 속에서도 여권 후보의 지지율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책임정치의 원리로 따지자면 당시 이회창의 대선승리는 불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왕적 총재로 상징되는 3김정치를 끝내야 한다는 여론 속에서 소신있는 대쪽판사의 이미지를 갖춘 이회창의 인기는 상당했습니다.
‘옥의 티’는 현직 대통령인 김영삼과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선후보의 비자금 수사를 놓고 YS와 정면충돌했습니다. 대세론을 누리던 이회창은 검찰의 DJ비자금 수사가 이어지면 대선은 사실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그러나 YS는 국가적 혼란을 이유로 비자금 수사 유보를 지시했고 이회창은 이에 강력 반발하며 YS의 탈당을 요구합니다. 급기야 이회창 지지자들은 대선필승 경의대회에서 YS를 상징하는 이른바 ‘03 마스코트’을 만들어 화형식으로 치릅니다. 이후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섭니다. 김영삼은 이인제의 대선독자 출마를 용인했고 이는 결국 이회창의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2007년 대선은 시작 전부터 결과가 예측된 게임이었습니다. 정동영은 이명박과의 대결에서 무려 530여만표 차이로 패하고 맙니다. 현 야권이 더불스코어에 육박하는 사상 초유의 대선참패를 기록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습니다. 87년 이후 역대 어떤 대선도 1·2위 후보의 격차가 500만표 이상인 적은 없었습니다. 87년 대선 노태우·김영삼 표차는 194만여표, 92년 대선 YS·DJ 표차는 193만여표였습니다. 97년 대선 DJ·이회창 표차는 39만여표, 2002년 대선 노무현·이회창 표차는 57만여표에 불과했습니다. 2012년 대선도 박근혜·문재인의 표차는 108만표 차이였습니다.
정동영은 왜 이렇게 패배했을까요? 현직 대통령인 노무현과의 관계설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애초 돈독했습니다. 2002년 노무현의 대선후보 경선 때 정동영은 사퇴없이 아름다운 경선완주로 노무현을 도왔습니다. 노무현은 통일부장관 입각 등 정동영이 차기 주자로 클 수 있도록 도움을 아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백년정당을 표방했던 열린우리당 해체를 놓고 격하게 갈등했습니다. 정동영은 10%대 초반의 지지율에 허덕이던 노무현과의 완전한 차별화에 나섰고 친노세력 역시 참여정부를 부정했다며 강력 반발했습니다. 양측은 대선직전까지 감정의 앙금을 풀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일 정도입니다. 정동영은 결국 2007년 대선 본선에서 친노세력의 지지 획득에 실패하며 대참패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97년과 2007년 대선국면에서 고 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과 매우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회창과 정동영은 실패했습니다. 이회창은 이후 두 번의 대선실패를 더 경험했고 정동영은 대참패의 여파로 현재까지 정치적 재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노무현·박근혜, 현직 대통령과의 전략적 관계설정으로 대선 성공
반대로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박근혜는 당시 김대중·이명박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에서 성공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한 평가입니다. 해법은 ‘전략적 모호성’입니다. 이는 전통적 지지층인 집토끼를 최대한 결집시키고 산토끼를 잡기 위한 외연확장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은 2002년 대선 국면에서 DJ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끌어안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한마디로 공과를 모두 끌어안겠다는 것입니다. 김대중은 임기말 DJP연대의 해체와 아들 비리 등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노무현은 지나친 차별화보다는 자산과 부채를 동시에 승계하겠다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박근혜도 마찬가지입니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은 사실상 MB탄핵 분위기로 치러진 총선입니다. 이명박의 인기는 바닥까지 추락했지만 현직 대통령과의 극단적인 차별화는 선택하지 않습니다. 대선에서도 이러한 기조는 이어졌습니다. 박근혜는 87년 체제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가장 극적으로 승리한 여권후보가 됐습니다.
두 사람의 성공요인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이 만일 DJ를 버렸다면 DJ 지지층 일부가 지지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레임덕에 빠진 DJ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면 영남이나 수도권에서 외연확장이 불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박근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세종시 수정안 갈등 등 이명박과 관계는 좋지 못했지만 대선에서는 전략적 스탠스를 유지했습니다. 지나친 차별화는 97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영남보수의 균열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명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제민주화라는 슬로건으로 유연한 차별화에 성공하며 득표전략에 효과를 보았습니다.
◇여야 차기주자, 박근혜와의 관계설정은 어떻게 가져가나?
여야의 차기주자들은 현직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가져갈까요? 여야를 가리지 않고 혜성처럼 등장할 유력 차기주자가 없다면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와의 관계설정을 고민해볼 후보군은 4명 정도라고 여겨집니다. 야권의 문재인, 안철수 그리고 여권의 반기문, 유승민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재인과 안철수의 경우 박근혜와의 과감한 차별화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야권 주자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야권 지지층 확보가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박근혜와의 무조건적인 차별화만이 능사일까요? 본인의 지지층을 100% 만족시킨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외연확장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2002년 대선 당시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좋은 사례입니다.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말은 본인의 지지층을 100% 만족시켰지만 역설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상대 후보 지지층의 결집을 돕기도 했습니다. 대선 이후 “두 정희(박정희, 이정희)가 박근혜의 당선을 도왔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문재인, 안철수는 야권주자라는 특성상 현직 대통령과의 차별화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박근혜 때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정신의 제시입니다.박근혜를 뛰어넘는 새롭고 참신한 그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박근혜와의 관계설정에서 고민이 더 깊어지는 후보들은 반기문, 유승민 등 여권 주자들입니다. 아무리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는 박근혜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지지율 30% 안팎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권 지지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박근혜를 무작정 끌어안고 가기에는 부담이 너무 큽니다. 반기문과 유승민의 고민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반기문은 지난 5월 한국 방문 이후 친박의 대선후보로 옹립된 듯한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반기문이 바보가 아니라면 박근혜와 친박의 지지만으로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는 박근혜와의 거리두기가 필수적입니다. 유승민 역시 온국민에게 알려진 박근혜와의 불편한 관계를 감안할 때 섣부른 차별화에 나설 수는 없습니다. 대선 본선은커녕 당내 경선 통과조차 불투명해집니다. 일단 당내 경선을 통과해야 대선본선에 나설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관계회복이 불가피합니다.
아울러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불투명한 외연확장에 매달리기보다 내 지지층 100%를 투표장으로 이끌어내는 전략이 더 효과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속설이 맞다면 문재인, 안철수는 현직 대통령 때리기를 통한 선명한 차별화에 그리고 반기문, 유승민은 현직 대통령 옹호와 계승에 무게를 두는 게 정답입니다. 내년 대선국면에서 여야 차기주자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몹시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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