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내로라하는 국내외 소설가들의 대표작들이 줄줄이 무대에 오른다. 원작의 유명세를 발판 삼아 작품 완성도를 높이고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극단 걸판의 뮤지컬 ‘앤 ANNE’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연작소설 ‘빨강머리 앤’ 가운데 1권 ‘녹색 지붕의 앤’이 원작이다. “해와 달이 있는 한 나 앤 셜리는 내 마음의 벗 다이애나 베리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든지, “앤 뒤에 e자가 붙은 철자의 앤으로 불러주세요” 등 원작 속 대사를 무대 위에 입체적으로 살려낸 것이 백미다. 오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CJ아지트 대학로에서 공연한다.
원작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다. 걸판여고 연극반이 정기공연으로 ‘빨강 머리 앤’을 올리기로 하면서 생기는 소동을 유쾌하게 그린다. 극 중 앤 역을 3명의 배우가 나누어 연기해 성장하는 앤을 표현했다. 초록지붕 집에 살게 되기까지의 과정, 학교생활의 모습, 집을 벗어나 도시로 나가 새로운 꿈을 꾸는 장면을 각각 나누어 보여준다.
극단 걸판의 대표 최현미 연출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앤이라는 인물이 매우 다르게 남아 있더라.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수많은 베스트셀러 중 ‘빨강머리 앤’을 무대화한 이유는 뭘까. 최 연출은 “대학로에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작품은 많지 않다. 왜 남자 역할이 주인공이고 여자는 시련을 받기만 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면서 “시련받는 여주인공이 아니라 여자 주인공을 인간으로서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을 무대화한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유독 올해 눈에 띈다. 이미 공연 중이거나 예정된 대작 뮤지컬의 반 이상은 소설이 원작이다. 출판사 한 관계자는 “무대에 바로 쓸 수 있는 독특한 감성의 묘사와 대화문이 있는 작품을 공연계에서 선호한다”며 “리메이크에 성공한 원작자에 대한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이어 “과거 읽는 맛에만 머물렀던 문학 텍스트를 배우의 언어와 노래·연기 등을 통해 복합적 방식으로 즐기려는 소비층이 늘고 있는 것도 이유”라고 전했다.
뮤지컬 ‘레베카’는 영국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미스터리 원작 소설과 서스펜스 영화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모티브로 했다. 뮤지컬 ‘아리랑’은 탄탄한 원작을 충실히 옮기는 데 집중했다. 조정래 작가가 1990~1995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동명의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지구를 3바퀴 반 이상 돌 정도의 거리를 직접 취재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다. 원고지 2만 매, 전 12권의 대작을 스타연출가 고선웅이 대본화해 2시간 40분짜리 뮤지컬로 만들었고, 이번이 재연이다.
24일과 내년 2월 개막하는 뮤지컬 ‘벤허’와 ‘닥터지바고’ 역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벤허’는 ‘유다 벤허’라는 한 남성의 삶을 통해 고난과 역경, 사랑과 헌신 등 숭고한 휴먼 스토리를 담아낼 예정이다. ‘닥터지바고’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격변기를 살아간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유리 지바고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랑을 그린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동명 장편소설이 원작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작에 빛나는 작품이다. 이후 1965년 데이비드린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져 아카데미 5개 부문을 수상했다.
△검증된 내용…실패 확률 적어 ‘선호’
일본 유명 소설가 야마다 무네키의 소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뮤지컬로 옮겨진다. 제작사 파파프로덕션은 “상처만 안기는 세상을 뜨겁게 살다 간 여인 ‘마츠코’의 내면을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그려낼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해 먼저 유명해진 작품도 있다. 오는 30일 4년 만에 재공연을 앞둔 뮤지컬 ‘서편제’는 작가 이청준(1939~2008)이 1976년 발표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1993년 임권택 감독이 동명 영화로 제작해 100만 관객을 동원했다. 불행한 측면들을 포착하면서도 그 이면을 냉정하게 응시한 작가 세계를 무대화했다.
공연제작사 한 관계자는 “아예 새로운 창작물을 선보이는 것보다 실패할 확률이 적다”면서 “신작의 경우 짧게는 2~3년, 길게 10년 이상 작품 개발에 시간과 돈을 쏟더라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반면 대중적으로 검증된 소설은 사건과 서사가 뚜렷하고 인물 심리 묘사가 탁월해 무대화하기에 좋다”고 했다. 다만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친숙한 원작을 얼마나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의외성을 갖느냐가 작품의 성패를 가른다”고 덧붙였다.
통상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작품을 연극화할 경우 저작권은 1000만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계 측 관계자는 “계약 조건에 따라 작가와 출판사가 7대 3 또는 8대 2의 수익비율로 나누는 게 일반적”이라며 “짧은 기간의 소극장 작품의 경우 무료로 지원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