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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태양 때문에 벌어진 두 가지 상반된 일. 프랑스작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 하나. 주인공 뫼르소에게 물었다. “왜 살인을 했소.” 그의 대답은 이랬다.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아무런 기약 없이 20년 수형생활을 한 한국 무기수의 상황이 다른 하나. 그에게도 질문을 했다. “왜 자살을 하지 않았오.” 그의 대답은 이랬다. “햇볕 때문에.”
부조리사상의 정점에 올라 노벨문학상까지 안은 카뮈라 해도 지금은 관심이 없다. 오로지 무기수의 그 햇볕에만 마음이 쓰인다. 왜냐고? 사람을 살렸으니까. 겨울 독방에서 길어야 2시간 남짓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이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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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은 많았지만 그의 인생에서 마디를 만든 저서는 크게 세 권이 될 듯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90), ‘강의’(2004). 그리고 ‘담론’. ‘감옥…’이 극도의 고통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풀어냈다면 ‘강의’는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그가 탐색해온 동양고전을 이해하는 법을 정리한 것이라 하겠다. 결정판은 ‘동양고전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법’이라 할 ‘담론’으로 찍었다. ‘시경’ ‘주역’ ‘논어’ ‘맹자’ ‘한비자’가 차례로 들춰졌고 그 여과틀로 정치, 통일, 자본주의 논의를 걸러냈다. 동양고전의 온화한 독법에 현실비판이란 칼을 숨긴 셈이다.
▲절망·역경 극복은 사람 키우는 일로 극복해야
에피소드부터 하나 보자. 신 교수가 감옥서 만난 늙은 목수 얘기다. 어느 날 이 목수가 나무꼬챙이를 들고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그린 집 그림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건데. 집을 그릴 땐 누구나 지붕부터 그려 아래로 내려오지 않나. 그런데 이 목수는 주춧돌로 시작해 지붕으로 마무리를 하더란 거다. 마치 진짜 집을 짓는 것처럼.
신 교수가 여기서 끌어낸 교훈은 차이와 다양성 문제다. 차이를 감사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공존의 대상으로 맞추려다 보니 온갖 사건·사고가 터져 나온다는 말이다. ‘다르다는 건 학습의 교본이고 변화의 시작’이라는 사고는 이후 그의 인생을 관통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결국 자신과 다른 어떤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이었으니.
‘주역’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을 답으로 삼았다. ‘큰 과실은 다 먹지 않는다’는 속뜻으로 사람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전한다. 답뿐만 아니라 희망의 언어로 품었다. 그에게 궁극적인 인문학은 ‘사람 키워 내는 것’으로 절망과 역경을 극복하는 일이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통일(統一)은 통일(通一)이어야
화동(和同)은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를 줄인 말이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는 뜻.
신 교수가 ‘논어’ 구절에서 꺼내온 화동은 통일론에 적용했다. 통일은 평화공존이어야지 흡수합병 같은 패권주의여서는 안 된다는 논지다. 그래서 그가 쓰는 통일은 ‘통일’(統一)이 아니라 ‘통일’(通一)이다. 이 틀에서 본다면 결코 “통일은 대박”일 수 없단다. ‘우리의 소원’이 대박처럼 갑자기 터질 땐 오히려 파탄이고 충격이지 않겠느냐고 했다. 마땅히 준비도 과제도 바뀌어야 한다. 통일(統一)에서 통일(通一)로 가는 옮겨가는 과정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거라 단언한다.
▲만남 없다면 자본주의는 왜소해질 뿐
‘맹자’에는 ‘곡속장’이라 전해지는 예화가 나온단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그 소가 불쌍하니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는 이야기. 왜 그랬을까. 소가 더 값나가는 가축이라? 아니다. 선왕이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여기서 핵심은 ‘본다’란 사실인데, 이 한마디에 ‘만난다’ ‘서로 안다’를 다 포함해 비로소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 신 교수의 뜻이다.
굳이 일화가 필요했던 건 관계의 정수를 말하고 싶어서였다. 근래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건 만남이 실종된 관계 탓이란 거다. 가령 식품에 유해물질을 넣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고 악플 테러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도 두 대상이 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사철 벗겨내야 비로소 세계가 보여
“변방은 창조의 공간이다. 기존 틀 속에 갇히지 않고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기 때문이다.” 강의를 녹취해 책의 바탕으로 삼았다지만 책의 배경은 결국 노학자의 감옥인생이었다. ‘감옥은 곧 대학’이라고 할 만큼, 20년 수형생활의 배움과 깨달음이 오늘의 ‘담론’에 이어졌다고 겸손해 한다. ‘문사철’(文史哲)이 빠져버린, 인문학 위기에 대한 우려에도 일침을 놨다. 되레 문사철이란 인식틀에 갇혀 있어서 문제란 거다. “언어와 개념, 논리라는 추상화된 그릇으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담을 수도, 온당하게 인식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시대와 역사, 반성과 성찰에 그가 평생 들이댔을 죽비의 서늘함이 온전히 전해진다. 서두르지 않으니 차분하다. 깊이가 있으니 일렁임도 없다. 그를 따라나서려면 뽀족한 방법이 없다. 그 흐름에 맞추는 것밖에는. 힐링 아니다. 철학이고 사색이다. 그렇게 읽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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