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씨는 20여년간 어머니를 모셔온 것은 자신인데, 명절 때조차 제대로 얼굴을 비친 적이 없던 다른 형제들이 어머니에 대한 후견청구를 한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법원도 자신의 효심을 인정하고, 본인을 후견인으로 선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법원의 후견개시심판 과정은 B씨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다른 형제들은 별다른 소득도, 직업도 없는 B씨가 어머님께 빌붙어 생활한 것이지 어머니를 돌본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모욕감을 느낀 B씨는 다른 형제들의 불효막심함을 법원에 낱낱이 밝혔다. 그러자 법원은 변호사 T를 후견인으로 선임했다.
B씨는 평생 어머니를 모셔온 자신을 배제하고 생면부지인 변호사를 후견인으로 선임한 법원의 판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나, 후견인이 어머니의 상황을 살펴보면 B씨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라는 실낱 같은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B씨의 그런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T는 B씨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B씨가 가져간 어머니 돈을 당장 돌려놓지 않으면 소송을 하겠다고 윽박지르기만 했다. B씨가 채용한 요양보호사도 해고하고 새로 요양보호사를 선임했다. 새로 선임한 요양보호사는 후견인하고만 얘기하겠다며 B씨와는 아무런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다.
변호사 T의 입장은 이렇다. 재산상황을 조사해보니 어머니와 동거하는 딸 B씨가 어머니의 재산을 사적으로 유용한 정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씨는 뻔뻔하게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자신에게 증여한 것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다고 잘 돌보는 것도 아니다. 요양보호사는 타성에 젖어 업무를 태만히 하고 있었고, 후견인의 모니터링에 비협조적이었다. 어머니는 쇼파에 앉아 무의미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유일한 일과였다. T가 보기에 현재 어머니의 생활환경은 열악하다 못해 위험했고 즉시 개입이 필요했다.
B씨에게 가져간 돈을 돌려놓지 않으면 소송을 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기존 요양보호사는 해고했으며 직접 면접을 봐 새로 요양보호사를 채용했다. 새로운 요양보호사가 나타나자 B씨는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요양보호사에게 매일 전화를 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며 요양보호사를 괴롭혔다. 결국 T는 요양보호사에게 후견인하고만 얘기하고 직접 응대하지 말라고 지도하였으며, B씨에게도 요양보호사에게 민원이 있으면 자신에게 알릴 것을 통지했다.
제3자 후견인은 피후견인의 재산, 신상을 둘러싸고 친족들 사이에 극심한 다툼이 있거나, 피후견인을 돌볼 가족이 없는 경우 주로 선임된다. 법원은 재산 분쟁이 극심하거나, 그 규모가 큰 경우에는 변호사·법무사와 같은 법률전문가를, 신상에 대한 다툼이 극심하거나 적절한 돌봄이 제공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회복지사를 각 선임하는 편이다. 돌볼 사람이 없는 무연고자들에 대해서는 공공후견사업을 통해 자원봉사조로 활동하는 공공후견인을 선임하고 있다.
제3자가 후견인으로 선임된 경우, 사례와 같이 피후견인의 가족들과 후견인이 대립하는 일이 많다. 양자가 생각하는 것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법원이 가족들을 배제하고 제3자를 후견인으로 선임한 것은 국가가 강제로 가족관계를 끊어낸 것과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인다.
그에 반해 전문가 후견인들로서는 가족들이 피후견인을 위해서라는 명목아래 제기하는 각종 민원들을 듣고 있으면 `남보다 못한 게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제3자 후견인은 피후견인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가족들에 비해서 객관적으로 피후견인의 이익만을 위한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다는 점, 전문직의 경우 그 전문성을 피후견인의 돌봄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 가족들의 분쟁에서 피후견인을 분리하여 안정적인 생활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 가족들에 비해 부정행위를 저지를 위험이 적다는 점 등이 장점이다. 실제 제3자가 후견인으로 선임되면, 그 전보다 피후견인의 복리가 증진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일본의 경우 전체 후견인의 약 75%가 제3자 후견인이다.
문제는 내가 치매 등으로 판단능력이 부족해졌을 때 생면부지의 변호사나 사회복지사가 나를 돌봐주길 희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정반대로 제3자를 후견인으로 선임하는 것이 자기결정권 존중이라는 성년후견제도의 원칙에 비추어 본인을 위한 최선이라고 하긴 어렵다. 오히려 제3자를 후견인으로 선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차선책 또는 차악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치매 등으로 판단능력이 부족해질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임의후견, 신탁, 기타 여러 제도들을 이용해 미리 법적 준비를 해 두는 것이다.
☞배광열((裵光烈)변호사는
△변시 3회 △사단법인 온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