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유재희 기자] 지난봄. 몸살감기 기운이 있어 회사 근처 내과를 방문한 A씨에게 의사는 건강상태에 대한 간단한 문진 후 대뜸 실비보험 가입 여부를 물었다. 실비보험에 가입한 걸 확인한 의사는 “독감 증상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 독감 여부를 검사(검사비 3만원)해 보자”며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니 그동안 영양주사(5만원)를 맞으며 쉬라”고 권했다. A씨는 평소 보험 활용도가 낮았던 만큼 본전 생각에 의사의 권고대로 의료 서비스를 받았다.
A씨는 실비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가입했더라도 보험금 청구횟수와 금액에 따라 보험료가 올라가는 구조였다면 최소한 독감 검사는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주변에도 ‘실비보험 못쓰면 바보’라는 식으로 도수치료 등 불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사례들이 모이고 모여 실손보험 손해율이 최근 130%까지 치솟았다. 보험사들이 보험료로 100원을 받아 지급한 보험금이 130원이란 얘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손보험 판매를 중단하는 보험사마저 나오고 있다.
전체 가입자 수가 3400만명을 돌파하면서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보험이 위기에 처했다. 특히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는 문재인 케어의 풍선효과로 의료쇼핑이 급증하고 의료계의 과잉진료가 난무하면서 손해율의 상승 속도가 가파르다는 게 보험업계의 설명이다. 환자를 돈벌이로 생각하는 의료인과 일부 이용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원인이란 얘기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실손보험 가입자 중 보험금을 한 번도 탄 적 없는 사람이 40~50%에 달하고 가입자 중 10% 정도가 전체 보험금의 70%를 가져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의 원리가 위험을 개인에게서 집단으로 전가시키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 구조 속에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면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실손보험 지속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서 그 해법으로 부상한 게 보험료 차등제다. 보험료 차등제는 자동차보험처럼 병원에 자주가 보험금 청구가 많은 가입자에겐 보험료를 더 받고 반대의 경우 할인해 주자는 것이다. 현재는 실손보험 이용 여부와 관계없이 나이와 성별 기준으로 손해율 상승에 따른 비용을 공동 부담하는 구조다. 즉 손해율 급등은 보험료 인상으로 작용해 전체 가입자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보험연구원은 최근의 손해율 수준이 지속될 경우 매년 10%씩 보험료가 올라 현재 40세인 실손보험 가입자가 70세에 부담해야 할 보험료가 지금보다 무려 17배 높아질 것으로 추산했다. 선량한 가입자가 정작 보험이 필요한 시기에 높은 보험료 부담 때문에 보험계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보험사 부실과 선량한 가입자들의 부담 증가로 이어지지 않도록 의료 이용량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부과해야 하는 이유다. 이를 통해 최소한 가입자들의 무분별한 의료쇼핑과 비윤리적 의료기관의 과잉·허위진료는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영국 등 해외에서는 실손보험 청구 횟수에 따라 보험료를 최대 70% 차등적용하고 있다.
실손보험이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한 만큼 우리도 더는 보험료 차등제 도입을 늦출 수 없다. 다만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고령자, 중증 질환자 등 의료 필수이용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