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협상' 저희가 모델이죠"…대화로 사람 구하는 경찰관들

손의연 기자I 2018.10.01 06:00:00

김근준 서울청 위기협상팀장 인터뷰
언제 상황 발생할 지 몰라 24시간 대기
"상대와의 유대감 형성이 가장 중요"
내년 위기협상 전문 수사관 활약 기대

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 출동 모습 (사진=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
[이데일리 손의연 기자] 지난 7월 6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샛강문화다리 구조물에 정모(55)씨가 올라섰다. 그는 “가족들이 자신을 외면한다”며 구조물 위에서 농성을 벌였다. 정씨는 앞서 올해 4월과 5월에도 교통사고 조사결과에 불만을 품고 같은 장소에서 농성을 벌인 전력이 있다.

에어매트가 깔리고 경찰이 주변 교통을 통제했다. 위기협상(CRISIS NEGOTIATION)이라고 적힌 점퍼를 입은 경찰관이 사다리차를 타고 남성에게 접근했다. 위기협상팀이 수차례 사다리차를 타고 오르내리며 설득한 끝에 정씨는 6시간만에 아래로 내려왔다.

“일단 상대가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은 좋은 신호죠. 협상의 여지가 생긴거니까요. 그렇다고 조급해하면 안 됩니다.” 서울 중랑구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지수대) 사무실에서 만난 김근준(45) 위기협상팀장(지능범죄수사대 2계장)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 자살시도·인질극 대처 위해 2014년 첫 도입

지난달 19일 개봉한 영화 ‘협상’은 위기협상전문가 하채윤(손예진 분) 경위를 포함한 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이 국제 범죄 조직원이 벌인 인질극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김 팀장은 “위기협상팀을 다룬 영화가 개봉한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다”며 “하채윤의 실제 모델인 이상경 경사와 한국위기협상학회를 만든 이종화 전 경찰대 교수가 영화 시나리오 감수를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대화 하나하나에서 그 흔적이 드러나 흥미로웠다”고 전했다.

각 지방경찰청에 처음 위기협상팀을 꾸린 것은 지난 2014년이다. 자살시도와 인질극 대치상황에서 미숙한 대처로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자 위기협상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처음 도입했다. 4년이 흐른 현재 전국에서 전문교육을 받고 활동 중인 경찰관은 250여명이다.

작품에선 위기협상관(Negotiator)이 최첨단 시설을 갖춘 상황실에서 범인과 화상으로 대화하고 협상하는 모습이 나온다. 실제 위기협상팀은 현장에 출동해서 상황을 해결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싱황이 발생하면 팀장, 주협상관, 보조협상관, 정보관 등 3~4명이 팀을 이뤄 출동한다.전체 상황을 보고 조율하는 팀장과 상대와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주 협상관과 보조협상관, 정보를 담당하는 정보관 등으로 이뤄진다.

김 팀장은 “한 달에 4~5회 출동할 때도 있고 아예 사건이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제 상황이 발생할 지 몰라 사실상 24시간 대기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근준 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장. (사진=손의연기자)
기억나는 사건을 묻자 김 팀장은 지난 2014년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발생한 사건을 떠올렸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호텔지하에서 영업을 하던 남성은 해당 호텔방에서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하겠다고 위협하며 사장을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위기협상팀과 함께 호텔 부사장이 제3중재자(위기협상 상황에서 협상대상자와 협상가 이외에 협상에 투입되는 사람)로 나서 설득한 끝에 그는 제발로 현장에서 걸어나왔다.

한 여성이 한강 다리에서 벌인 자살소동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김 팀장은 “시력을 잃을 위기에 집안 사정도 최악이었다. 너무 딱해서 한강다리에 올라간 심정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5시간 동안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며 설득해 여성을 구해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유대감 형성이 중요…내년부터 위기협상 전문 수사관 첫발

김 팀장은 위기협상을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인질·납치 상황에 강제력을 동원하는 것보다 대화를 통한 위기협상이 인질의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와 유대감을 형성해야 하는게 제일 중요합니다. 진정하라거나 그만하라는 말은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이 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대화 없이는 협상도 없으니까요.”

경찰수사연구원은 해마다 경찰관을 대상으로 위기협상전문교육 과정을 열고 있다. 미국 FBI에서 전수받은 이론 교육과 함께 상황극에 연극배우들을 동원하는 사례교육까지 진행한다. 내년부터는 위기협상 전문 수사관도 임용할 예정이다.

김 팀장은 “위기협상전문교육이 생긴 게 10여 년밖에 안 됐지만 우리나라의 출발이 많이 늦은 상황은 아니다”며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위기협상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김근준 위기협상팀이 출동해 한 여성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사진=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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