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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쉰 살이 된 화가는 가로 세로 길이가 얼추 2m에 달하는 대형 캔버스에 극히 단순한 형태의 추상화를 그린다. 얼핏 보면 검은 바다에 자줏빛 노을이 지는 풍경처럼 보이는 그림은 점점 인생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는 중년 남자의 복잡한 심경을 단순한 구도 속에 담아냈다. 화가가 겪은 시대는 불행했다. 1903년 러시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열한 살에 아버지가 사망했다. 생활은 궁핍했다. 사춘기 무렵 세상은 1차대전의 광기에 휩싸였고 20대 후반에는 대공황을 겪어야 했다. 전쟁은 다시 반복됐다. 2차대전의 흔적은 비참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흥미를 잃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때부터 화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심연을 이루는 감정을 화폭에 담아내려 했다. 언어와 문화에 따라 달리 표현하지만 감정은 결국 인류 보편의 접점이라고 생각해서다.
미국의 현대화가 중 대가로 꼽히는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작품 50여점을 선보이는 ‘마크 로스코’ 전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로스코는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 작품 외적인 소식으로 한국 미술계에서 입에 오른 작가다. 2007년 5월 뉴욕 소더비경매에서 ‘화이트센터’가 7280만달러(약 820억원), 2012년 크리스티경매에서 ‘오렌지, 레드, 옐로’가 8690만달러(약 980억원)에 거래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가 말년에 “복잡한 사고의 단순한 표현”이라고 말한 로스코의 작품 철학에 공감한 것이 알려지면서 ‘잡스가 사랑한 화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로스코의 작품을 대규모로 국내에 전시하기는 처음이다. 이는 로스코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국의 워싱턴국립미술관이 로스코 전시실을 리모델링하면서 가능했다. 한국에 오기 전 네덜란드 헤이그 시립미술관에서 연 전시에는 20만명의 관람객이 몰릴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이번 전시에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로스코의 생애 전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추상으로 넘어가기 전의 ‘지하철 판타지’(1940)부터 1970년 작가가 자살하기 직전에 그렸던 ‘무제’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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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코의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화풍이지만 추상회화의 본질과 형상 및 역할에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했다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로스코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인간 삶이 지닌 드라마를 직접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각형 안에 담은 극도의 단순한 형태들이지만 그 안의 색채와 색들의 경계, 농도에 충분히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림이 관객에게 말을 걸어 ‘이야기’를 전하고, 그 이야기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어 때로는 관람객이 자신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쏟을 수 있다고 봤다.
생전에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비극, 아이러니, 관능성, 운명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며 “혹시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가진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장은 생전 로스코의 명성을 드높였던 ‘로스코 채플’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말년의 검은색 그림 7점으로 로스코 채플을 재현했다. 로스코 채플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위치한 작은 예배당으로 십자가 등 기독교적인 상징 대신 농도가 다른 검은색으로 칠해진 로스코의 작품 14점을 걸어, 삶에 대한 근본적인 사색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전시를 기획한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는 “이번 전시에 대여한 작품의 보험평가액만 약 2조 5000억원에 달한다”며 “로스코의 작품을 미국 바깥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23일부터 6월 28일까지. 02-532-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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