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재은 기자] 집을 사고 팔면서 계약 당사자간에 집값을 정하지 않고 일단 계약금만 주고 받은 뒤 집값은 나중에 논의해 결정하는 경우가 있을까.
현대그룹이 사모펀드에 현대증권(003450) 유상증자 실권주를 넘기면서 맺은 손실보전 계약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현대그룹은 사모펀드가 차후에 `시장가격`으로 실권주를 되팔 수 있게 풋옵션 계약을 맺었다는 의아한 공시를 먼저 한 뒤, 한참 지나서야 손실보전내용이 들어있음을 밝혔다.
실권주 처리가 급해서 일단 풋옵션 계약을 맺었고 손실보전의 구체적 내용은 차후에 논의해 확정지었다는 것이다.
증권가에서는 투자자에 대한 일종의 기만행위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집을 매매키로 하고 계약금만 우선 주고 받은 뒤, 집값을 얼마로 할지 그래서 결국 잔금을 얼마나 치를지를 추후 결정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11일 금융감독원과 현대그룹 등에 따르면 현대증권은 지난달 27일 5950억원(우선주 7000만주)규모의 주주배정 유상증자 청약에서 무려 68.8%의 실권주가 발생했다. 현대증권은 당일 이사회를 열어 자베즈 제1호PEF, NH투자증권, 현대상선에게 실권주를 배정했다. 각각 1919억원, 953억원, 900억원에 이른다.
당시 업계에서는 실권주 인수규모가 워낙 커 별도의 계약이 있지 않겠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이틀 뒤인 29일 현대상선은 자베즈에게 풋옵션을 부여했다는 내용의 공시를 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좀 의아했다.
자베즈가 인수한 실권주 주당 가격은 8500원. 자베즈에게 부여된 조건은 `계약일로부터 5년째 되는 날 현대증권 주가가 8500원 이하이거나 계약일로부터 3~5년 동안 60영업일 평균종가가 5000원 이하`인 경우에 현대상선에 실권주를 다시 넘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경우 옵션 행사가액을 `옵션행사를 통지받은 다음날 영업일 종가`로 정했다. 이날 공시만 놓고보면 자베즈는 현대증권 주가가 인수가격보다 떨어지면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데, 행사가격은 시장가격이어서 주가하락에 따른 손실을 자베즈가 고스란이 떠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해를 넘겨 지난 6일이 되서야 자베즈에 대한 반대급부가 상세히 담긴 새로운 공시를 현대그룹측은 내놓았다.
우선 현대엘리베이터(017800), 현대상선(011200), 현대U&I 등 현대그룹 3개 계열사가 자베즈가 실권주 인수에 투입한 자금(1919억원)에 대해 향후 5년간 연 7.5%의 수수료에 지급하고, 앞으로 주가가 8500원을 밑돌 경우 손실을 보전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주가 5000원까지는 현대그룹이 손실을 전액보장해주고, 5000원 미만일 경우에 그 부분만 자베즈가 손실을 떠안는 구조였다. 따라서 주가가 5000~8500원 사이에서만 움직여도 자베즈는 매년 144억원에 달하는 수수료를 안정적으로 챙기면서 주식매각시 손실도 보전받게 되는 셈이다. 반대로 현대증권 주가가 8500원보다 높을 경우 자베즈는 연 144억원의 수수료와 함께 차익의 20%를 가져가지만, 배당금은 다시 현대그룹측에 반납하는 구조다.
현대측은 NH투자증권(016420)에 대해서도 향후 3년간 연 일정 수수료와 함께 우선주 인수가에 대해 원금보장을 해 주기로 했다. 자베즈와 NH투자증권은 변동성이 큰 에쿼티(주식)에 투자했다기 보다는, `원금보장+알파`의 안정적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채권과 유사한 상품에 투자한 셈이다.
증권가에서는 풋옵션과 연계한 손실보전 내용이 들어있는 공시를 뒤늦게 한 이유에 대해 실권주 처리가 임박한 상황에서 우선 풋옵션 부여에 대해 먼저 합의를 하고, 손실보전과 이익분배 등 구체적 내용은 추후 협의에서 확정됐기 때문에 시차가 발생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풋옵션을 부여하면서 손실보전 내용이 연계돼 있다면 한꺼번에 관련 내용을 타결짓고 공시를 해야 정상"이라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마치 실권주 처리가 현대그룹측의 손실보전없이 진행된 것처럼 공시했다가 차후에 추가공시를 통해 손실보전 내용을 밝힌 것은, 미처 그 내용을 모르고 현대 계열사 주식을 산 투자자들을 당황케 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현대그룹에 이에 대해 "자베즈측은 현대증권 우선주의 발행조건과 보통주 주가, 현대증권의 PBS(프라임브로커리지서비스) 자격 요건 등을 감안해 투자를 결정한 것으로 안다"며 "실권주 이후 투자금 운용 방식 중 하나로 현대그룹측과 파생상품계약을 논의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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