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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이데일리 노희준 기자] 삼성디스플레이의 협력업체 A사 연구원 권모(36)씨는 중국 경쟁업체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해당 업체는 권씨에게 스마트폰 액정화면, TV 등에 주로 쓰이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핵심 기술을 갖고 이직하면 지금 연봉의 3배를 주겠다고 했다.
최근 조직개편 과정에서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한 권씨는 이런 은밀한 속삭임에 연구원 4명과 짜고 회사의 핵심기술 파일 5000여건을 빼내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권씨의 행각은 국가정보원 첩보망에 감지됐다.
첩보를 넘겨받은 첨단산업보호 중점검찰청인 수원지검(지검장 차경환)이 수사에 나섰고 권씨와 권씨의 이직협상을 주도한 중국인 이모(30·여)씨 등 7명을 붙잡았다. 우리나라 수사기관이 기술유출 혐의로 외국인을 기소한 첫 사례다.
거액의 투자와 오랜 연구를 통해 개발한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사건이 기승을 부리면서 산업스파이 검거의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수원지검이 주목받고 있다. 대검찰청은 지난해 12월 수원지검을 첨단산업보호 중점검찰청으로 지정했다. 중점검찰청은 각 검찰청마다 주특기를 부여해 해당사건을 집중적으로 수사하게 한 제도다.
◇기술유출 범죄처리 40% 증가 “전문인력 필요”
수원지검은 작년말 첨단산업보호 중점검찰청으로 지정된 후 올해 8월말까지 기술유출 범죄(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및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사건)183건(454명)을 적발해 해결했다. 월 평균 23건을 처리한 셈이다. 지난해 한해동안 169건(428명)을 처리한 것과 비교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이수권 수원지검 2차장검사는 “중국의 휴대폰 기술 수준이 한국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마지막 남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국내 핵심기술에 대한 기술유출 시도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8월 발표한 ‘한중 수출구조 변화 비교와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120개 국가전략 기술에서 한국과 중국의 기술격차는 2014년 1.4년에서 2016년 1.0년으로 0.4년이 좁혀졌다.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에 따르면 기술유출 피해업체의 예상 피해액이 연평균 50조원에 달한다는 추정도 있다.
첨단산업보호 중점검찰청으로 지정된 이후 수원지검은 형사1부에 ‘첨단산업보호수사단’을 설치해 전담 소속 검사 4명과 수사관 등을 배치했다. 검사 4명 중에는 변리사 출신의 검사와 이학석사 학위를 가진 검사 등 첨단기술에 대한 이해가 높은 인력들이 포진해 있다.
여기에 유출된 기술이 실제 어느정도 보호할 가치가 있는 기술인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연구원과 대학교수, 기업인, 변호사 등 16명으로 구성한 ‘첨단산업보호 수사 자문위원회’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검찰의 고질병인 인력부족 문제는 첨단기술 파수꾼인 수원지검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원지검 형사1부는 기술유출 사건 뿐 아니라 일반 형사사건도 함께 처리하고 있다.
첨단산업보호수사단을 이끌고 있는 김욱준 형사1부 부장검사는 “일반 형사사건과 기술유출 사건이 8대 2는 된다”며 “첨단산업보호 중점검찰청의 지정 취지에 맞는 전담부서 신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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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모든 기술이 산업기술보호법이나 부정경쟁방지법상 보호되는 기술이나 영업기밀은 아니다. 산업기술보호법의 기술은 산업부의 지정 고시를 받아야 한다. 그외 기술이 영업비밀이 되려면 부정경쟁방지법상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김욱준 부장검사는 “영업기밀이 되려면 해당 기술이 비공지성(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음), 비밀관리성, 경제적 유용성 3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며 “특히 비밀관리성 측면에서 예전에는 비밀 유지를 위한 상당한 노력을 기업에 요구해 기업이 조금만 허술하게 관리했다면 영업기밀이 아니라며 무죄가 많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기술유출의 목적도 중요하다. 산업기술법과 부정경쟁방지법상 기술유출을 했더라도 부정한 이익을 얻거나 그 대상기관에게 손해를 가할 부정한 목적이 없으면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 삼성과 LG에서 첨단 유기발광당이오드(OLED)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된 외국계 검사장비 제조업체(오보텍)직원에 대해 대법원은 최종 무죄판결을 내렸다. 기술은 유출됐지만 삼성과 LG제품을 검사하기 위한 연구개발용도였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었다.
이수권 2차장검사는 “기술유출 사건이 쉬운 사건이 없다”며 “보호할 만한 기술이면서 법상 빼돌린 것이 맞는지 유출 목적은 어떠했는지 다 확인해야 한다”며 “단계단계마다 피고인이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기술유출 사건 수사나 재판이 길어지면서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모든 범죄의 처벌은 범죄를 저지른 시점을 기준으로 이뤄진다. 기술유출 범죄도 마찬가지다. 다만 기술은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 유출 당시에는 첨단기술이었던 것이 재판시점에 범용기술이 돼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게다가 대중의 관심마저 사라지면 온정적인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김욱준 부장검사는 “첨단기술이 몇달 안돼 범용기술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기술이라도 일단 해외로 유출되면 개인적 범죄가 아니라 국부의 유출을 가져오는 국가적 범죄가 된다”고 말했다.
이수권 2차장검사는 “기술유출은 국가기밀이다. 기술 내용에 따라서는 안보와 즉결된 것도 있다”며 “새로운 분야 개척도 중요하지만 기존 분야 기술에 대한 유출을 잘 막아야 경쟁기업에 눈뜨고 당하는 일이 없어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