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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1시 서울 서대문노인종합복지관에서 강사 박만인 어울림연구소 대표가 노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생각 안 해봤는데” 수강생들은 말문이 막혔다. 박 대표는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선녀 입장에서 목욕하는데 누가 내 몸을 쳐다보면 관음인 데다 옷까지 훔친다면 절도죠. 그러면서 옷을 주겠다고 여자를 유인해요. 전형적인 성폭력의 수법이죠. 이런 동화를 손주에게 곧이곧대로 들려주면 되겠어요?”
박 대표의 말에 수강생들은 “옛날 얘기를 별 생각 없이 해주면 안 되겠네”, “시대가 달라졌네”하며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남자는 3번 울어야 한다? 다 성차별!”
서울 서대문노인종합복지관이 지난 12일 ‘손자녀 양육프로그램 <손주병법>’ 2기의 첫 수업을 실시했다. 앞서 같은 프로그램으로 1기생들이 지난 3~5월 간 수업을 들었다.
서대문구 성평등기금의 지원을 받아 개설된 이 수업은 다음 달 31일까지 매주 화요일 총 8번에 걸쳐 수업이 진행된다. 이 중 1·2회차 교육은 노인들의 굳어진 성차별적 인식을 개선해 평등하게 손주를 키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내용으로 마련돼 있다.
1회차인 이날 수업은 무심코 아이들에게 읽어줬던 동화에 어떤 성차별적 이야기가 내포돼 있는지와 무심코 저지르는 성희롱·성추행적 행위들을 지적하는 등의 내용으로 이뤄졌다. 이날 수업엔 여성 18명·남성 2명 등 총 20명의 노인이 참가했다.
수업이 시작되자 박 대표는 손자·손녀에게 해서는 안 될 말부터 설명했다.
박 대표는 “남자는 일평생 3번 울어야 하고 여자는 살림을 해야 한다는 게 맞는 말이냐”고 반문한 뒤 “그런 말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 수 있으니 해선 안 된다”고 단호히 말했다.
이어 “손자한테 파란색을 입히고 딸이라고 분홍색을 입히는 것도 고정관념”이라며 “불편한 틀을 정해놓고 성별에 맞춰 강요하는 것”라고 비판했다. 이어 “여자아이한테 ‘여자는 다리를 오므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코르셋”이라고도 덧붙였다. 수강생들은 각자 가져온 노트에 메모하거나 박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강의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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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중 수강생끼리 열띤 토론도 벌어졌다. 각자 가정의 양성평등 점수를 매겨 보자는 강사의 말에 한 60대 여성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남녀 각자가 할 일이 있는 것”이라며 “이게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여성은 “현재 우리 가정 내 성평등은 10점 만점에 8점만큼 잘 이뤄져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다른 수강생은 “아직도 집안일은 여자, 바깥일은 남자가 한다는 인식이 있다”며 10점 만점에 6점을 줬다.
한 노인이 “남자가 보통 연장자인 경우가 많으니 남성을 우대하는 차원에서 남성 중심으로 가정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자 다른 수강생들이 “무슨 남자만 어른이냐”며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수업을 마친 수강생들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6살 손자를 돌봐주고 있다는 정모(71·여)씨는 “항상 손자에게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분홍색 옷도 안 입혔다”며 “이제는 손자 취향에 맞춰서 옷도 자유롭게 입히고 울 때도 울게 놔두겠다”고 말했다.
예비 조부모라고 밝힌 조모(65·여)씨도 “나도 밥상을 차릴 때 아들에게 숟가락을 먼저 주고 딸은 나중에 줬는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사소한 성차별적 행동을 손자녀에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고 다짐했다.
손자병법 수업은 다음 달 31일까지 진행되는 2기 수업을 모두 마치면 3기 수업도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복지관 관계자는 “평가회 때 나왔던 피드백이 굉장히 좋았다”며 “계획대로라면 다음 달 이후에 3기 교육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