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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역사를 바꾸다 [물에 관한 알쓸신잡]

이명철 기자I 2022.03.26 11:30:30

수로와 운하를 통한 변화

[최종수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단종은 이듬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당합니다. 단종은 한강의 광진대교 근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물길을 이용한 것은 아마도 백성들의 눈을 피하게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도성에서 가까운 마포대교 근처의 마포진이나 한남대교 근처의 한강진을 이용하지 않고 도성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광나루를 이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겠죠.

한강은 단종 유배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는 강이기도 하지만 한양에서 강원도와 충청도를 오가는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형상 산이 많아 육로를 통해 대규모의 물건을 운송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한강을 비롯해 금강, 영산강, 낙동강, 섬진강, 대동강 등 내륙 깊숙이까지 뻗어 있는 강을 이용한 수운은 육상을 통한 육운보다 훨씬 효율적이었습니다. 조세로 납부하는 세곡 운반은 물론이고 지역간 생활필수품 교류가 대부분 물길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한강은 한양을 강원도와 충청도와 연결시켜 주고 대동강은 평양을 평안남도와 함경남도와 연결시켜줬으며 영산강과 섬진강은 호남 지방, 낙동강은 영남 지방의 내륙 곳곳을 연결시켜줬습니다.

강 주변이나 바닷가에 위치한 지역에는 자연스럽게 나루터가 발달해 지명에도 나루터를 의미하는 진(津)이나 포(浦)가 들어간 경우가 많습니다. 포가 들어간 지명은 김포, 격포, 법성포, 영산포, 목포 등이고 진이 들어간 지명은 거진, 주문진, 정동진, 울진, 부산진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도에서 이 지명을 찾아보면 포가 들어간 지명은 대부분 서해안에 있고 진이 들어간 지명은 동해안에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과 포가 모두 물가와 나루터를 의미하지만 포는 개 또는 갯벌이라는 뜻으로 조수가 드나드는 나루터를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조수와 갯벌이 있는 서해안의 나루터에는 포를 쓰고 조수와 갯벌이 없는 동해안의 나루터에는 진을 썼습니다. 한강의 나루터도 조수가 드나드는 곳까지는 마포, 영등포, 반포 등이라 하고 위쪽의 조수가 드나들지 않는 곳은 광진, 잠도진(지금의 잠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로를 통해 운송되는 물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곡이었고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세곡을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은 국가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세곡은 바닷길과 한강을 거쳐 도성으로 운반되었는데 강화도 근처 손돌목이라는 곳의 뱃길이 험해 해난사고가 잦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 중종 때 해난사고를 피하기 위해 한강 하류와 인천 제물포를 직접 연결하는 수로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토목기술로는 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원적산에 막혀 제물포까지 연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수로가 지금의 굴포천입니다. 굴포천의 이름도 팔 굴(掘)과 나루 포(浦)로 써서 인공적으로 판 나루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완성하지 못한 한강 하류와 서해를 직접 연결하는 수로 공사는 1987년 굴포천 유역이 홍수로 큰 피해를 입자 한강의 물을 서해로 빨리 내보내기 위한 치수사업으로 다시 추진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물을 내보내기 위한 방수로로 건설할 경우 홍수가 발생할 때만 일시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로의 규모를 키워 단순한 방수로가 아닌 수운이 가능한 운하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1995년도부터 경인운하사업이 시작됐지만 계속되는 환경단체의 반대와 경제성 논란 등으로 사업은 수년간 표류됐습니다. 이 수로는 오랜 기간 동안 논쟁과 타당성 검토를 계속하는 우여곡절 끝에 2011년 경인아라뱃길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파나마운하와 수에즈운하. (이미지=최종수 박사)


육지에 인공 수로를 만들어 물길을 짧게 하려는 시도는 바닷길로도 확대됐습니다. 육지를 연결하기 위해 물을 건너는 다리를 놓는 것처럼 바다를 연결하기 위해 육지를 관통하는 운하를 만들었습니다.

대서양과 인도양을 잇는 수에즈 운하,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파나마 운하가 대표적입니다다. 파나마 운하는 남아메리카 해안을 돌아가는 우회항로 대신 북미 대륙과 남미 대륙을 관통하는 항로입니다. 이 항로가 만들어져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2만2500km의 기존 바닷길이 9500km로 단축됐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로 대신 이집트 근처의 좁은 육지를 가로질러 가는 바닷길을 만들어 부산항에서 유럽까지 3만km 가까운 항로를 2만km로 단축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목인 만큼 매일 50여척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합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배가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관문이다 보니 수에즈 운하 때문에 역사가 바뀐 일도 있었습니다.

러·일 전쟁 중 러시아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유럽에 있는 발트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하는데 신속한 이동을 위해서는 당연히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수에즈 운하를 소유하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러시아 발트함대의 이동에 협조적일리가 없었습니다.

영국은 운하의 얕은 수심과 좁은 폭을 이유로 발트함대의 대형 군함은 통행을 허락해 주지 않고 소형 군함만 통행을 허락했습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주력함대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7개월 만에 일본 쓰시마 해협에 도착합니다.

예상보다 긴 항해로 지칠 대로 지친 발트함대를 기다린 건 일본 연합함대였습니다.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 발트함대를 상대로 역사상 보기 드믄 해전인 쓰시마 해전을 승리로 이끕니다.

이 해전 이후 러·일 전쟁은 종식됐고 러·일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인정함으로써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나라의 주권이 빼앗기는 계기가 됐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러시아 발트함대의 주력군함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전투력 손실 없이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함대와 싸웠다면 러일전쟁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러·일 전쟁의 결과가 달라졌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수에즈 운하가 열리면서 우리나라와 유럽을 연결하는 항로는 1만km나 줄었습니다. 물류비용과 소요시간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항로보다 7000km나 더 짧은 항로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부산항을 출발해 러시아 인근의 북극해를 통과하는 항로입니다. 늘 얼음으로 덮여 있던 북극해가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으면서 선박 운항이 가능할 정도로 바닷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빙하가 녹는 속도를 감안하면 북극항로를 이용해 유럽으로 갈 수 있는 계절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물류 측면에서는 환영할 일이지만 지구 온난화가 역설적으로 만들어 준 항로라는 사실에 반길 수만은 없을 듯합니다.

■최종수 연구위원(박사·기술사)은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University of Utah Visiting Professor △국회물포럼 물순환위원회 위원 △환경부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자문위원 △대전광역시 물순환위원회 위원 △한국물환경학회 이사 △한국방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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