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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史 외면한 이슈, "다시 써라" 외치는 연극인들

장병호 기자I 2020.11.03 05:50:00

'2020 연극의 해' 공연 '언도큐멘타'
연극사가 배제한 변방의 이슈 무대로
친일·젠더·장애인 등 도발적 문제 제기
나열식 구성…불명확한 방향성 아쉬움도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2020 연극의 해’ 유일한 공연 프로그램으로 지난달 31일과 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선보인 공연 ‘언도큐멘타: 한국 연극 다시 써라’는 한국 연극사에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었다.

제목인 ‘언도큐멘타’(undocumenta)는 문서화된 기록을 뜻하는 ‘도큐멘타’(documenta)에 반대의 의미를 뜻하는 접미사 언(un)을 붙인 단어다. 한국 연극사가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이슈들을 다시 바라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2020 연극의 해’ 공연 프로그램 ‘언도큐멘타: 한국 연극 다시 써라’의 한 장면(사진=‘2020 연극의 해’ 집행위원회).
한국 최초의 여성 극작가 김명순(1896~1951)의 이야기, 한국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랑 유치진(1905~1974)의 친일 논란과 드라마센터 사유화 문제로 출발한 공연은 젠더 문제, 장애인, 외국인 이민자 등 소수자에 대한 연극의 태도 등 지금의 한국 연극이 맞닥뜨리고 있는 이슈들을 연극 재연, 낭독공연, 렉처 퍼포먼스 등을 통해 펼쳐 보였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차범석, 최인훈, 오태석, 이윤택, 이강백 등 남성 극작가·연출가들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토크’였다. 강지은, 고수희, 이주영, 장영남, 정경순 등 연극계 대표 여성 배우들이 이들 작가들의 작품 속 여성 캐릭터로 분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최인훈 작가는 나처럼 씩씩한 심청이를 왜 그렇게 처참하게 그린 거야.” ‘달아 달아 밝은 달아’(최인훈 작)의 심청(정경순 분)이 한탄하자 ‘심청’(이강백 작)의 간난(강지은 분)은 “현대로 끌어올린 모든 심청이는 주체가 아니라 남성 중심 관점의 대상이다”라고 꼬집는다. 오랫동안 여성 서사를 배제해온 한국 연극에 대한 일침이었다.

연극인들이 ‘2020 연극의 해’를 맞아 한국 연극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나선 이유가 있다. 블랙리스트와 ‘미투’ 운동 등을 겪으며 연극계 내에 형성된 다양한 담론들을 기존의 연극사가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에서다. ‘2020 연극의 해’ 또한 축제의 성격을 버리고 보다 안전한 창작환경과 지속적인 생태계 조성, 관객 저변 확대 등 연극계 기반을 다지기 위한 사업들로 운영하고 있다.

‘2020 연극의 해’ 공연 프로그램 ‘언도큐멘타: 한국 연극 다시 써라’의 한 장면(사진=‘2020 연극의 해’ 집행위원회).
다만 이번 공연은 한국 연극사를 어떻게 새로 쓸지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은 보여주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한국 연극이 맞닥뜨린 다양한 이슈들을 나열식으로만 보여주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을 통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윤택, 오태석의 작품이 언급된 부분도 논란이 예상된다. 연극 말미에 등장하는 “너무 복잡하다”는 대사는 이날 공연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과도 맞닿아 있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제한된 인원만 참석해 진행한 지난달 31일 공연에는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 김철호 국립극장장, 김광보 국립극단 신임 예술감독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자리를 빛냈다. 공연 시작 전 축사로 나선 박 장관은 “오늘 이 자리가 한국 연극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나아가 미래의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보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며 “‘2020 연극의 해’ 사업이 끝나더라도 이번 사업이 연극계에 남긴 과제를 계속해서 고민해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심재찬 ‘2020 연극의 해’ 집행위원장은 “한국 근현대 연극사를 새로 정리하는 작업은 우리 연극의 큰 동력이 될 것”이라며 “‘2020 연극의 해’가 성과를 바라는 행사가 아닌, 세대를 넘나들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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