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12일자 ‘뉴욕 헤럴드’가 전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해당 기사는 전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일본은 기사 보도 이전까지 사건과 하등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심지어 황후는 흥선대원군과의 ‘중세적’ 갈등 과정에서 시해됐다고 변명했다.
기사로 전 세계적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결국 일본 군인 미우라가 사건에 연루됐음을 시인하고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했다. 이처럼 을미사변의 배후가 밝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목격하고 생생히 알린 러시아인 사바틴 등의 증언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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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틴이 기록한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당시 고종의 요청으로 경복궁에서 미국인 윌리엄 다이(William Dye) 장군과 당직을 서고 있었다. 군인도 아닌 외국인이 경복궁에서 당직을 서게 된 이유에 대해 이정수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학예연구사는 ‘삼국간섭’ 등 시대적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1895년 4월 23일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요동 반도를 차지하게 된다. 이를 견제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외교적 개입으로 결국 일본은 철수하게 된다.
이 같은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과 손을 잡는다. 일본에게 황후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조짐을 느낀 고종은 미국인 닌스테드(F. J. H. Nienstead) 대령까지 3명에게 경복궁에서 당직을 서도록 했다. 혹여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조선의 입장을 해외에 전달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바틴은 “우리의 임무는 객관적 증인으로서 일본인들이 궁궐에서 어떻게 명령을 내리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며 “순서에 따라 매 6일 중 4일동안 궁궐 내에서 체류했고, 궁궐에는 항상 두 명의 유럽인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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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틴은 이후 일본으로부터 생명의 위협과 생활고에 시달려 한동안 조선을 떠났다. 일본의 암살위협과 더불어 그는 조선에서 임시직도 잃었다. 러시아 공사관은 그가 더 이상 조선에서 어떤 직무도 하기 힘들다는 통보까지 했다. 결국 4년여간 조선을 떠난 사바틴은 1899년 조선으로 돌아와 1904년 까지 여러 건축 및 토목에 관여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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